나는 나를 관찰한다
단골 카페에 가고 있었다. 백반 식당에서 나오던 세 명의 중년 남성이 보였다. 가장 앞서 식당 밖으로 나왔던 남성분이 갑자기 길에 침을 뱉었다. 근데 그 방향이 자신의 동료들이 걸어 나오는 방향이었다. 침은 그들의 거의 앞에서 낙하했고, 그들 중 누구도 그 상황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불편한 건 정말 그들과 아무 관련 없는 나뿐일까.
종종 ‘내가 너무 예민한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을 본다. 나도 그들 중 하나일 때가 있다. 그리고 가만히 살펴보면, 예민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니까 모든 상황, 모든 사람, 모든 순간에 예민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 검열을 하고는 한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단어가 주는 어감 때문이다. 모든 단어에는 그 단어가 갖고 있는 어감과 이미지가 있다. '예민하다'라는 단어가 주는 일반적인 이미지는 부정적인 경우가 더 우세한 듯하다.
하지만 항상 기억하려고 한다. 단어는 의외로 힘이 없고, 그 자체의 뜻은 우리가 짐작하는 느낌과 다를 수 있다는 걸. 또한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양면성이 있다는 걸.
나는 미각이 예민하기 때문에 미세한 음식의 맛의 차이를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음식의 간을 맛있게 잘 보는 편에 속한다. 그리고 어떨 때는 나의 자궁에 아주 작은 근종이 생겼을 때. 나 스스로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산부인과에 내원하여 확인했다. 그때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은 그게 일반인이 눈치챌 수 없는 크기인데 어떻게 알았냐고 놀라며 여러 번 묻기도 했다. 음악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곡을 들을 때 다양한 악기나 세션을 최소 세 가지 이상은 구분해서 들을 수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했다.
내 직업에서 이 예민성이 가장 유용할 때는 내담자의 감정을 알아차릴 때이다.
내담자와 마주 보고 앉아 있을 때 내담자가 느끼는 분노나 슬픔 등이 나에게도 동일한 감각으로 밀려 올라온다. 그때 나는 그에게 물었다.
'혹시 지금 울고 싶은가요...?'
잠시 생각하는 듯 보이던 내담자는 이내 울음을 왈칵 터뜨리고는 했다. 그런 것 같다며.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나는 당신을 공감하고 있다'는 느낌을 건넨 것이다.
이러한 내 능력이 일상에서는 꽤 벅찰 때도 많다.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의 감정까지 우르르 밀려 들어올 때가 있으니까. 그래서 사람이 많은 곳을 기피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내게는 고통일 때도 많은 강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는 능력.
신은 언제나 공평한 행복과 고통을 준다는 말처럼. 딱 절반의 축복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