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실험이라더니 범죄자 취소실 같잖아? 은우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실험실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CCTV가 설치된 곳으로 손을 흔들었다. 누군가 자신을 엿보고 있는 사실이 썩 유쾌하지 않아 기분을 즐겁게 전환시키려는 자구책이었다. 손을 흔들어도 상대편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테이블 위에는 말로만 듣던 거짓말 탐지기가 놓여 있었다. 지금 누군가가 자신의 핸드폰을 털어 국민들에게 공개한다고 해도 부끄러울 게 없다고 생각하지만 질문자가 자신의 어떤 내밀한 구석을 파고들지 알 수 없어 은우는 긴장이 되었다.
자리에 앉으니 상대방이 처음으로 말을 했다. 손을 거짓말 탐지기에 올리고 밴드를 조이라고 했다. 만약 기계가 거짓으로 판단하면 손에 약한 전류가 흐를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은우는 전류라는 말에 겁이 났다. 시작도 안 했는데 찌릿함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재밌는 거 맞아? 무서운 실험 아니야? 은우 손에서 자꾸만 땀이 났다.
"감은우 씨, 결혼 일찍 해서 20대를 즐기지 못하신 것 같은데요. 일찍 결혼한 거 후회 안 하세요?"
은우는 말문이 턱 막혔다. 대체적으로 후회하지 않지만 가끔 그때 더 놀다가 결혼할 걸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가장의 책임을 너무 일찍 짊어진 것 같아서 지난 시간의 자신이 안쓰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은우는 생각을 정리하고 대답했다. '후회 안 해요'라고. 거짓말 탐지기가 잠잠했다. 은우는 '휴'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마이크 켜지는 소리와 함께 질문이 날아왔다.
"재테크를 잘하시는 것 같던데, 신혼부터 지금까지 자산을 이만큼 불릴 수 있었던 건 다 감은우 씨 본인 덕분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내의 노력도 인정하나요?"
은우는 덫에 갇힌 것 같았다. 문을 박차고 나가면 주최 측에 항의하리라.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었다. 자신의 얼굴은 상대방에게 노출되어 있는데, 자신은 질문을 던지는 저쪽의 목소리밖에 듣지 못하고 있다. 몰래카메라처럼 저쪽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수십 명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표정 관리도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우는 호흡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아내의 공이 컸습니다.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만큼 자산을 불릴 수 없었을 거예요."
거짓말 탐지기는 삐 소리와 함께 전기를 흘려보냈다.
"아씨 이거 왜 이래? 진실이에요. 이거 이상해요. 억울해."
은우가 말했다. 저쪽에서 희미하게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한 명의 웃음이 아니었다. 당황한 은우 손에서 땀이 났다. 마지막 질문이라는 저쪽의 말에 은우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감은우 씨는 가만히 있고 싶은데 사람들이 자꾸 감은우 씨를 찾나요? 감은우 씨가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나요?"
은우는 스피커 너머 멀찌감치 떨어져서 웃고 있는 목소리에 신경이 쓰였다.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이 자신을 찾는 것이라고. 거짓말 탐지기가 또 한 번 '삐'하고 울리며 전기를 보냈다. 앞에 있는 줄 몰랐던 화면이 켜졌다. 아내 정은과 딸 하은, 아들 우성, 직장 후배 H가 손을 흔들었다. 저것들이 화면 너머에서 나를 놀리고 있었구나. '괜히 참여했구나' 싶었다. 무슨 데이터를 수집하려고 이런 실험을 하는 거지? 우성은 실험실을 빠져나가며 생각했다.
'거짓말 탐지기 정확도가 꽤 높은데?'
오민철(7화 공미진 편, 14화 황은희 편 / 공미진의 남편이자 황은희의 오피스 허즈번드)
주머니를 털어도 먼지 한 점 나오지 않을 사람이라며 괜히 허세를 부렸다. 과하게 결백을 주장한 말미에 거짓말 탐지기가 기다리고 있을 줄 몰랐다.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거짓말 탐지기는 정확도가 떨어져서 재미로 쓰는 장난감으로 치부했는데, 수사용 거짓말 탐지기라니, 민철의 팔에 솜털이 모두 일어났다.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지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봐도 제 꾀에 제가 빠졌음을 알았다. 어떤 질문이 기다리고 있을지, 제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질문만은 비껴가길 바랄 뿐이었다. 질문이 시작되었다.
"오민철 씨, 집에서 아내가 만들어주는 요리가 최고죠?"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목소리만 들렸다. 민철은 어디선가 거짓말 탐지기가 긴장과 당황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망설이지 말고 거침없이 모든 질문에 대답하기로 했다.
"당연하죠. 미진이가 요리를 잘해요."
"삐!"
거짓말 탐지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전기를 보냈다. 찌릿함이 민철의 손끝으로 전해지며 살짝 아팠다.
"주말에는 가족에게 최선을 다하나요?"
민철은 이번에도 오래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요."
"삐!"
'질문 리스트는 누가 작성한 거야? 질문이 왜 이따위야?'
민철은 거짓말 탐지기에 올리지 않은 한쪽 손으로 자신의 코를 만지며 생각했다. 실험이 아니라 수사를 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설마 이걸로 그걸 알아내려는 것인가..? 직장 동료들이 나를 골탕 먹이려고 마련한 자리인가....? 민철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아내를 사랑하세요?"
민철은 화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례한 질문이었다. 소리를 버럭 지르고 싶었다. 몰래카메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민철은 다시 침착하기로 했다. 상황을 전부 파악하기 전까지 속내를 드러내선 안 된다. 민철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며 생각했다. 자신은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요즘 자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은 황 차장이었다.
'함께 한 시간이 얼마인데.. 황 차장을 향한 마음은 사랑까진 아니야. 호감이지 호감. 사랑하고 아끼는 건 미진이야.'
민철은 마음속으로 주문을 걸고 심호흡을 한 다음 대답했다.
"네. 사랑합니다."
1초. 2초. 3초.
"아아아앗."
민철은 엄살을 부리는 아이처럼 아파했다.
기분 탓인지 전기 충격이 점점 강해지는 것 같았다. 신경을 긁는듯한 기분 나쁜 촉감에 날카로운 '삐'소리가 더해져 민철은 거짓말 탐지기를 바닥에 던지고 싶은 욕구가 끌어올랐다. 이성이 툭 끊기려는 찰나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미진이었다. 저쪽에 미진이가 있었다. 모두 미진이가 원한 질문이었다. 미진이는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이제야 오른쪽 모퉁이에 설치된 CCTV가 보였다. 미진은 자신의 행동도 모두 관찰하고 있었을 것이다. 민철은 속이 불편해졌다. 체한 것인지 구토가 올라올 것 같았다.
문성재(13화 서아람 편, 서아람의 남편)
앞 참가자가 죽을 상을 하고 실험실에서 나왔다. 마주치는 참가자끼리 대화가 금지되어 있었기에 성재는 민철과 눈인사만 하고 실험실로 들어왔다. 실험이 끝나면 근처 유명 소고기 집의 무료 식사 이용권이 가족 인원수만큼 제공되었다. 성재는 소고기 육회의 고소한 참기름 냄새를 맡은 듯 기분이 좋았다. 솔직하고 빠르게 대답한 후 어서 소고기를 입에 녹이러 가리라.
질문이 시작되었다.
"문성재 씨, 장모님 생신을 정말 잊었나요?"
성재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네."
거짓말 탐지기가 울리지 않았다. 성재는 '뭐 이런 싱거운 질문이 다 있지?'라고 생각했다.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자신이 진짜 성인 ADHD라고 생각하나요?"
하하. 이 질문일 줄야. 아람에게 '자신은 ADHD가 분명하다, 병원에 가서 검사해 볼 필요도 없다'라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아니요."
이번에도 거짓말 탐지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문성재 씨는 자신이 ADHD든 아니든 부족한 주의력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 있나요?"
생각이 필요한 질문이었다. 아람이 ADHD를 운운할 때 성재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ADHD라 하더라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으니(여태껏 잘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있고) 굳이 노력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재는 마지막 대답을 외쳤다.
"아니요."
모든 항목에 '진실'로 응답한 처음이자 마지막 실험자였다. 성재가 앉은자리 맞은편에 있는 줄 의식하지 못했던 화면이 켜졌다. 아람이 보였다. 성재는 해사하게 웃으며 아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람의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