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의 질문에 찬형은 마시던 맥주가 명치쯤에서 턱 하고 걸렸다. 아직 목구멍을 넘기지 않은 맥주가 입 밖으로 뿜어져 나오려는 걸 겨우 틀어막았다.
"왜 그래? 사레들렸어? 천천히 마시지. 으이그."
진정된 찬형은 정하가 아까 자신에게 했던 질문을 잊은 것 같아 대화 주제를 슬그머니 다른 곳으로 돌렸다.
찬형은 소액 투자로 고수익을 약속한다는 러닝 동호회 회원 A의 말에 넘어가 1억을 투자했다. 첫 달에는 200만 원, 다음 달에는 300만 원.. 매월 편차가 좀 있긴 하지만 투자 수익금이 통장에 꽂혔다. 투자 수익금은 공짜로 생긴 돈 같았다. 자신의 돈을 맡기기만 했을 뿐인데 불로소득이 300만 원이나 생기다니! 찬형은 이런 신세계가 있는 줄 몰랐다. 투자 좀 한다는 사람들은 다들 이런 방식으로 돈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너무 정석대로만 산 것 같아 아쉽기까지 했다. 한 번은 투자 수익으로 정하에게 줄 명품 가방을 샀다. 그때의 뿌듯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찬형은 마치 통장에 현금을 몇 억씩 쟁여놓고 몇 백만 원쯤은 언제든 일시불로 결제할 수 있는 부자가 된 것 같았다. 찬형은 앞으로 자신의 월급은 실컷 놀고먹는 데 다 쓰고 투자 수익금을 저축해서 집을 마련하는 데 요긴하게 쓰기로 했다.
투자 수익금이 입금되지 않은 첫 달이었다. A는 이번 달에 사정이 좋지 않아 수익금을 줄 수 없지만 다음 달에 더 많이 입금하겠다며 미안하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두 번째 달에도 입금이 되지 않자 찬형은 A에게 문자를 보냈다. 답이 없었다. 전화를 했다. 전화가 꺼져 있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전화기는 켜지지 않았다.
러닝 동호회 회원인 H의 한 마디에 단톡방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찬형과 같은 방식으로 A에게 투자한 사람이 열다섯 명이었다. H의 투자 금액이 가장 적었고 찬형보다 더 큰 금액을 투자한 사람도 몇 명 있었다. A가 먹튀 했다는 걸 직감한 회원 한 명이 대화 도중 경찰에 신고했고, 얼마 뒤 A는 구속되었다. A는 사업 실패로 돈을 다 날렸기 때문에 당장 돌려줄 수 있는 돈이 없었다. 계약서를 꼼꼼하게 써둔 몇 명에게는 A가 출소 후 평생에 걸쳐 조금씩 갚아야 하는 법적 의무가 발생했지만 찬형의 계약서는 법적 효력이 없는 문서였다. 계약서를 제대로 써 두었다고 해도 매월 10만 원씩 갚아봤자 저 자가 남은 인생 동안 얼마를 갚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러나저러나 1억은 공중으로 흩뿌려졌다.
1억은 정하가 끝까지 모르는 돈이어야 한다. 그 돈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찬형은 그만큼의 현금을 모으기 위해 자신이 흘린 피, 땀, 눈물은 잊고 어떻게 하면 그 돈이 처음부터 없었던 돈이 될 수 있을지 계산기를 거꾸로 돌리는 데 집중했다.
홍경민(6화 임예진 편, 임예진 남편)
깜깜한 새벽, 시계가 4시 반을 알린다.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경민은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가족 모두가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한 다음 문을 열고 집을 나선다. 주차장에 세워 둔 차문을 열어 백팩을 꺼내 둘러매고 어딘가를 향해 묵묵히 걷는다. 귀에는 블루투스 이어폰이 꽂혀 있다. 노래를 듣는 것인지 가끔 머리를 리드미컬하게 흔든다. 30분쯤 걸어 해변에 도착했을 때 경민은 백팩에서 봉지 하나와 집게를 꺼낸다. 접이식 집게를 길게 펼친 다음 해변을 걸으며 쓰레기를 주워 봉지에 담는다. 틈틈이 머리 흔드는 것을 잊지 않는다. 하얀 피부에 하얀색 티셔츠를 입은, 둥둥한 체격과 짧은 스포츠머리의 그는 마치 백곰처럼 보인다.
사위가 조금 밝아왔을 때 경민은 해안가에서 주워모은 쓰레기를 공영 쓰레기통에 버린 다음 탈의실로 들어간다. 잠시 후 백곰이 아닌 흑곰이 탈의실에서 나온다. 어느새 해변가에는 경민과 비슷한 쫄쫄이 복장의 사람들이 이삼십 명쯤 모여 있다. 춤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어설픈 몸짓은 아마도 준비운동인 것 같다. 오늘은 누가 퍼스트 펭귄이 될 것인가? 누군가가 검은 물속으로 몸을 던지자 흑곰을 포함한 쫄쫄이 부대가 줄줄이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대장을 따라 해변에서 먼 곳까지 헤엄친 검은 존재들은 삼십 분쯤 지났을 때 붉은 태양을 등에 걸치고 전사처럼 돌아왔다. 떠오르는 태양의 장엄한 기운을 한 몸에 받으며 모래사장에 발을 디딘 경민은 1대 100으로 적군을 물리치고 살아서 고향에 돌아온 최후의 승자처럼 보인다. 경민은 몇몇 물개와 하이파이브로 인사를 나눈 후 샤워실로 간다. 잠시 후 샤워실에서 다시 백곰 한 마리가 나온다. 블루투스 이어폰에서는 어떤 음악이 흘러나오기에 이따금 뒤뚱거리며 머리를 흔드는지 관찰자가 경민 귀 옆에 귀를 바짝 들이대고 싶게 만든다.
집에 도착한 경민은 백팩을 차 트렁크에 싣고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간다. 커피 두 잔을 내리고 토스트와 과일을 준비하고 있을 때 예진이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온다.
"굿모닝."
예진이 경민에게 다가와 과일을 깎는 경민의 뒤에서 끌어안는다.
"뱃살이 쏙 들어갔어. 당신 요즘 식단 조절해?"
경민은 어깨를 으쓱 올리며 아니라고 말한다. 예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왜 비슷한 걸 먹는데 자신만 살이 찌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하곤 화장실을 향한다. 경민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중년 남자도 비밀 하나쯤 마음속에 품고 싶을 때가 있다.
곽태경(16화 오나경 편, 오나경의 남편)
나경이 출근하고 딸 민아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킨 태경은 지난 주말 어머니 집에서 받아 온 국을 데우고 반찬을 꺼내 여유롭고 맛있는 아침 식사를 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내려 마시며 태경은 어머니께 카톡을 보낸다.
- 엄마가 끓여준 미역국이 최고야. 장조림이랑 일미 무침, 겉절이 김치 꺼내서 방금 아침 다 먹고 커피 한 잔 중.
1인 식사용 소반에 세 가지 반찬을 덜어 담은 3칸 나눔 접시 하나, 밥그릇, 국그릇, 수저를 정갈하게 세팅해서 찍은 사진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 사진까지 첨부해 마치 여자 친구나 아내에게 보낼법한 내용이다. 엄마는 '우리 아들이 잘 먹으니 엄마가 반찬 해주는 보람이 있다'라며 하트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태경이 이번 주말에는 일 때문에 엄마 집에 갈 수가 없다고 톡을 보내자 엄마는 '그럼 오늘 낮에 새 반찬 갖다 두고 집 청소도 좀 해두고 올게'라고 답했다. 태경은 엄마에게 현관문 비밀번호를 남겼다.
- 내가 우리 집 비번 톡으로 알려준 거, 나경이 알면 안 돼. 알지?
- 엄마 눈치 있는 거 알지?
태경은 엄마와 대화를 나눈 톡방에서 '나오기'를 클릭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출근 전까지 여유 있는 시간을 만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