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헬로쿠쌤 Jun 09. 2021

돌쟁이 아기 엄마의 수상한 취미생활

시골살이가 준 선물

햇살이 따가운 초여름 오후 2시, 돌이 채 되지 않은 아기를 유모차에 태워 걸어갔다. 거칠 것 없는 시골의 햇살은 모질 만큼 따가웠다.

저 아기 엄마는 이 더위에 도대체 어디를 저렇게 열심히 가는 걸까?

그 당시 나를 보는 이웃들은 아마 궁금했을 거다. 모두가 바빠서 다른 사람을 신경 쓰기 힘든 도시와는 달리, 시골에서는 길을 가기 어려울 정도로 아는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된다. 겨우 2년 조금 넘게 시골생활을 했던 나 조차도 나중에는 읍내에 나가면 아는 얼굴들을 잔뜩 만났던 경우도 있었으니까. 시골생활 초기에는, 이곳에 나를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주는 묘한 해방감이 반갑기도 했다.


그 해방감이 무뎌질 무렵의 여름, 나는 탈출구가 필요했다. 지금 당장 돌도 되지 않은 둘째와 20개월 위의 첫째를 두고 일을 하러 나갈 수도 없는 노릇. 게다가 옥천에서 가까운 대전까지 왔다 갔다 하며 일 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경력의 단절과 낯선 시골살이 때문이었을까? 자존감이 낮아져서 우울하기까지 했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이 작은 동네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아이들을 케어하면서 말이다. 그리 많은 선택지는 없었다. 돈을 버는 경제활동보다는 낯선 시골에서 육아에 지친 삶의 활력을 되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취미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곧 죽어도 배우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이번에도 뭘 배울 수 있을지 주변 학원이나 지역 도서관 프로그램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아이 사교육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좀 이상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도 나는 아이들 교육비보다 내 교육비에 더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아직 취학 전 아이들을 키우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뭘 그렇게 계속 배우냐고? 그러게 말이다. 나는 그런 사람인가 보다.



초등학교 바로 근처였던 집 주변에는 음악학원이 꽤 있었다. 학창 시절 교회 반주를 할 만큼 괜찮았던 피아노를 다시 쳐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십 년 이상 피아노를 건드린(?) 적이 없어서 망설여지긴 했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해보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찾아간 한 작은 음악 교습소. 친절한 원장님의 배려로 학생들이 없는 시간대에  돌쟁이 아이와 같이 교습소에서 피아노 레슨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생각지도 못한 들이댐(?)이었다. 아이를 맡길 곳도 없는 낯선 곳에서, 아이가 혹시 피아노학원에서 엄마 옆에서 있을 수 있는지를 대담하게도 물어봤고 원장님은 선뜻 오케이 하셨다. 심지어 원장님은 내가 피아노 연습을 하는 동안에는 아기를 봐주시기도 했다. 아기와 함께하는 피아노 학원 생활은 어땠냐고? 예상대로 순탄하지 않았다. 아이가 너무 보채서 연습이고 뭐고 그냥 집으로 돌아온 적도 몇 번 있었다. 이렇게 까지 해서 취미생활을 이어가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시골생활의 낙이다'라고 여기며 꾸준히 해봤다. 시골생활 초창기라 아는 사람이 많이 없어서 남편 외에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음악학원 원장님이 거의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체르니 악보와 피아노 건반. 손이 많이 굳어있었지만, 금세 감이 돌아왔다. 이래서 악기는 조기교육을 하나보다 싶었다. 일주일에 세 번. 참 열심히도  피아노를 치러 다녔다. 비가 오는 날은 아기띠를 하고 우산을 쓰고 터벅터벅, 해가 쨍쨍한 날은 유모차를 밀며 잰걸음으로 총총. 욕심 같아서는 학원에서 진행하는 클라리넷 동호회에 참여하고도 싶었지만, 무리였다. 참고로 시골일수록 지방자치단체의 교육 지원이 굉장히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일례로 옥천군에서는 5~6인 이상의 동호인들이 모이면 강사비를 지원해주는 제도가 있어서 각양각색의 동호회가 많았었다. 클라리넷도 그렇게 군에서 지원받는 동호회였고 자비가 거의 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나를 위로해준 그 시간들

돌쟁이 아기와 그렇게 피아노를 치러 다닌 지 어느덧 6개월가량 지났을 무렵, 피아노는 삶의 활력이 되었다. 내가 서울에 계속 살았다면 다시 피아노를 배우고 연주할 여유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지금도 든다.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바쁜 삶 속에서 성인이 취미 하나 갖고 꾸준히 한다는 것이, 특히 어린아이가 둘이나 있는 여자에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아무튼 지나고 나니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낯선 곳에서의 그 시간을 음악이라는 로망으로 채워나갈 수 있어서, 그것도 아이들과 같이. 결코 수월하지 않던 그날들이 지금 돌아보니 큰 위로와 따스함으로 다가온다.

시골의 작은 음악회

시골의 작은 음악회

그 해 연말에는 학원에서 열리는 작은 음악회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기도 했다. 도시의 피아노 콩쿠르이나 연주회 같은 느낌과는 사뭇 다르지만, 음학 학원에 다니는 사람들이 각자의 악기로 연주곡을 준비해서 나누는 그 시간은 완성도를 떠나서 소중하고 따뜻한 자리였다. 학원을 문화공간으로 만들고자 하는 소망을 갖고 있던 원장님의 배려로 음악회에 참여하고 지인들도 초대할 수 있었다. 시골생활 1년 차에게 가족 말고 무슨 지인이 있겠냐만은. 영문도 모르고 엄마가 피아노 치는 것을 보는 아이들은 어땠을까? 아마 무언가를 느끼기엔 너무 어렸으리라. 그래도 엄마와 피아노 학원에 가고 같이 건반을 두드려보며 느꼈던 그 정서를 가슴 한편엔 가지고 있겠지란 바람을 가져본다.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자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처한 환경이나 상황을 급격히 변화시킬 수 없다면 거기에 적응하며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아보는 편이 빠르고 현명하다. 어쩌면 처음부터 나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이 함정이긴 하지만. 아무튼 이 당시의 나에게 피아노라는 고상하고도 수상한 취미생활은 낯선 시골생활을 잘하기 위한 최선이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다시 돌아온 도시와 어느덧 사라진 나의 고상하고도 수상한 취미. 대신에 큰 아이의 피아노 학원 가방을 챙겨주는 내 모습이 오늘따라 새롭고 낯설게 다가온다.




이전 03화 도시 이방인의 시골살이 필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