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내 음식 취향을 완벽히 파악해 버린 한 사람이 있었다. 카페에 가면 '알아서' 내 커피를 주문하고 테이블까지 가져다주는 센스까지 갖췄다. 데이트하며 식사 때마다 여러 가지로 배려하는 모습까지. 어쩜 이리 음식취향마저 서로 잘 맞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이 사람은 분명 내 영혼의 단짝이라 확신했다.
물론 식성 말고도 다른 중요한 가치관과 맞춰가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은 것이 결혼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먹고사는 취향도 매일 부딪히게 되는 적나라한 요소 중 하나다. 결혼 전부터 내 식성이 대중적이지 않은 것만은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고기도 즐기지 않고, 매운 것은 입에 잘 못 대는 맵찔이에다 좋아하는 음식은 가지, 카레, 락사, 베트남 쌀국수, 샌드위치, 커피 등 취향이 별나게(?) 확고해서 우리 가족에게 '식단 이단아' 취급을 받아왔었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해외생활을 할 때, 그 나라 음식에 재빨리 적응해서 한국음식이 그립다거나 음식 때문에 고생했던 적은 단언컨대 한 번도 없었다. (나이가 들어가니 한식이 좀 더 속 편하고 든든하긴 하더라)
결혼 7년 만에 깨달은 이 남자의 음식취향
아무튼 나의 이런 특이한 식성을 맞춰주며 늘 동행하던 그 남자는 지금의 남편이 되었다. 신혼 때는 서툰 솜씨로 차려낸 밥상을 감사히 여길 줄 아는 그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커피를 아주 좋아하는 나는 카페 가는 것도 즐긴다. 새로운 카페 분위기, 색다른 커피맛을 찾아가는 일이 일종의 취미가 되어버린 듯도 하다. 남편도 늘 나와 동행하며 카페 투어를 했다. (참, 카페탐방에 대한 글은 '서울댁의 나만 알고 싶은 시골 카페 4곳'을 참고하시길) 그러다 문득 발견한 진실, 아니 깨달음 한 가지. 어느 순간 보니 남편은 카페에서 커피 메뉴를 주문하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 말이다. 돌이켜보니 연애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게다가 이 남자. 고기를 정말 너무나 좋아한다. 대부분의 남자들처럼, 아니 사람들처럼. 내가 차려주는 음식에 단 한 번도 불만을 이야기한 적 없지만, 고기반찬을 하거나, 밖에서 고기를 먹을 기회가 생기면 참 잘도 먹는다.
이런, 이 사실을 왜 이제야 깨달은 거지?
간단히 말하면 눈에 콩깍지가 씌었으니 나 편한 대로 이 사람을 해석하며 좋아했던 것 같다. 식성까지 어쩜 이리 천생연분이냐며 동네방네 자랑하기도 했으니... 그렇다. 식성까지도 감추며 맞춰줄 수 있을 만큼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연애의 힘인가보다. 나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편이라 믿고 살았는데, 정작 나와 가장 가까운 짝꿍의 식성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실수를 해버렸다. 그것도 최근까지. 이 진실을 알고부터 식단도 고기 위주로 바꾸고 채소 식단이 많은 날에는 더더욱 고기를 곁들여서 풍성하게 만들었다. 고기 러버인 친구 왈 '고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고기가 있어야 채소가 맛있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이 남자. 좋아한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표정에서 드러나는 만족함이란!
그의 취향 그리고 나의 취향
이제는 카페에 같이 가도 굳이 커피를 권하지 않는다. 대신 그를 위해 초콜릿이 들어간 시원한 음료를 주문해준다. 그렇다고 남편은 아무 음료나 마시지는 않고 고디바(Govida) '다크 데카당스'를 기준으로 삼는다. 고디바 입문을 도와줬더니 어느새 입맛이 고급화되어버렸다. 정작 나는 고디바에 가서도 카푸치노만 마셔서 초콜릿 맛은 잘 알지 못한다.
아침은 베이컨을 곁들인 아메리칸 스타일, 점심은 치킨, 저녁은 제육볶음
최근 어느 주말, 우리 집 식단이다. 물론 식단의 버라이어티를 위해 채소 샐러드 듬뿍 포함이다. 아니나 다를까 만족해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있자니 나랑 같은 식성을 가진 사람인 줄 알았는데 속았다는 느낌까지 들기도 했다. 그래서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렇게 고기를 좋아하는데, 쌀국수, 샌드위치 이런 거 어떻게 다 참고 먹었어요?
그동안 속았다는 억울한 어투로 조곤조곤 물었더니 곧바로 돌아오는 대답.
당신이 좋아서요.
이 남자. 심쿵 포인트가 뭔 줄 아는 걸까? 아니면 너무나 심플한 진심일까. 뭐가 되었든 내 마음을 무장해제시켜 반박할 거리가 없게 만든다. 결혼 후에도 내 식성에 맞춰주려 애쓴 모습이 고맙기도 하고 말이다. 어쨌든 내가 너무 이 남자의 식성을 늦게 파악해버린 잘못(?)도 있으니...
과제가 생겼다
'Pursue your spouse.'
결혼 후에도 끊임없이 배우자에 대해 공부하라는 목사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가장 가까운 사이로 지내는 배우자를 파악하며 연구하고 맞춰가는 일은 평생의 숙제임에 틀림없다. 물론 쉽지 않다. 가끔은 나도 나 자신을 잘 모르겠는데 하물며 나와 다른 인격체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을 아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면 나와 남편은 대화를 참 많이 한다. 서로의 일, 주변 사람들, 아이들, 심지어 각자 먹은 점심 메뉴까지 공유하기도 한다. (남편의 점심메뉴에 고기가 늘 들어가는 것을 좀 더 일찍 눈치챘어야...)
식단에 신경 써야지!
식단에 신경을 쓰기로 했다.
코로나로 외출이 어려워 집밥 먹는 일이 더 잦아지기도 했고. 더 중요한 이유는 가족을 위해 애쓰는 가장이자 짝꿍의 음식취향 존중을 실천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건강한 고기반찬 위주로, 채소도 풍성하게 해서 영양도 맛도 손색없는 밥상을 만들어봐야겠다. 내가 이렇게 식단과 가족의 건강을 생각하는 가정적인 주부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곤 전혀 상상 못 했지만 그래서 삶이 더 재밌는 것이 아니겠는가. 혹시 아나? '집밥 백선생'을 능가하는 '집밥 헬로쿠쌤'이 탄생하게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