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로부터 물려받은 노트북이 있다. 쓰다 돌아버리겠다 하던 노트북이다. 버리는 거 잘해야 하는데, 내가 그걸 못한다. 그 돌아버리겠다던 노트북, 그냥 문서 정도만 쓰는데 뭐 대수냐며 물려받았다. 그런데 나도 가끔은 돌아버리겠다 싶을 때가 생기고 있다.
브런치도 시작했는데, 글 쓰는 폼이 좀 났으면 싶은 마음이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과 문양 노트북 쓰는, 그것도 우아하게 카페에서, 그런 모습 보면서 전시몰 어쩌고 하는 사이트를 하루가 멀다 둘러보기도 했다.
어느 날, 혹시 홈쇼핑에 싼 물건 나오지 않았을까 살펴보다 상조회사 상품을 보게 됐다. 와우, 노트북 주는 상조 상품이었다. 안 그래도 상조 가입해야 하는 거 아닌가 늘 생각은 있었는데, 노트북이 덤으로 생기는 구조. 물론 노트북이 덤은 아닌 게 100% 확실하겠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
어쨌든 상조회사의 그 마케팅 방식은 내 맘을 훅하니 낚아 버렸다. 홈쇼핑 말고 인터넷에서 더 괜찮아 보이는 상품으로 상조 가입을 했고, 지금은 노트북이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노트북은 사과 문양은 아니고, 쇠고기 5인분이 안 된다는 바로 그 노트북이다. 사과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꽤 우아하다는 생각을 했었던 노트북이다.(뭔 시스템인지 모르겠지만, 계약을 했다고 바로 노트북이 배송되는 시스템은 아니었다. 배송되기까지 한 20일 이상 걸리는 것 같다)
그나저나 노트북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지금, 내 머릿속은 헛된 상상으로 가득 차 있다. 새 노트북만 생기면 1일1글 할 수 있겠다 하는 그런 상상 말이다. 아마 처음에는 새 노트북 기운을 받아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새 노트북 에너지로 폼 나게 일필휘지 하면서 글을 올릴 수도 있겠다.
그런데, 아마도 며칠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 될 확률이 높다. 지금까지 내 생활 패턴을 보면 그랬다. 뭔가 물건이나 상징물 같은 걸로 내 맘을 잡아보려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엔 좀 약발이 있지만, 늘 새롭게 내 맘을 계속해서 사로잡지는 못했던 것 같다.
뭐, 늘 듣는 얘기긴 하지만, 문제는 내 맘이겠다. 새 노트북이 오든 말든, 본질은 글을 쓴다는 것일 텐데, 뭔가 조건을 지어서 A 하면 B 하겠다가 돼버린 것이다. 그냥 B 하면 될 것을 말이다.
지금 이렇게 글을 끄적이는 것은, A 하면 B 하겠다를 거부하는 몸짓이라고 봐도 되겠다. 원래 브런치를 시작할 때 1주일에 한 번은 글 올려보자 싶었는데, 그 생각이 벌써 깨지고 말았다. 그래도 이렇게 끈을 놓치지 않는 게 어디냐, 기특해하고는 있다.
조건을 지어서 나 자신과 거래(딜, deal)를 하는 것도 뭔가 동력을 얻는 방법이긴 하겠지만, 중요한 건 그런 조건 없이 항심을 갖는 게 아닐까 싶다. 그게 단순하게 살아가는 방법인 것 같기도 하고.
작년부터 한국판 뉴딜이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데, 이참에 또 한 번 구호를 정해 본다. ‘한국(限局)판 노딜’, 범위를 한정하고 딜 없이 그냥 하는 거다. 그나저나 구호는 구호고 새 노트북은 언제 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