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속에서 나를 구해준 글

고통은 산타 분장을 한 아버지와 같다.

by 이다이구

힘들 때가 있다. 아, 물론 기쁠 때도 있다. 나는 변덕쟁이다. 혼자 있는 것을 선호하면서도 동시에 피부가 까슬까슬해질 정도의 외로움을 느낀다. 눈을 번쩍이며 마치 사탕을 발견한 아이처럼 달려들다가도 이내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처참하게 지고 있는 경기을 보는 관중처럼 시큰둥해진다.


인간의 삶은 고통과 권태를 오가는 시계추라며 요즘 갑자기 유행하는 어느 한 염세주의 철학자가 말했다.


머릿속으로는 그의 말을 부정해도 또다시 피부가 까슬까슬해져 위를 올려다보면 거대한 시계추가 웅웅 소리를 내며 내 머리 위를 왔다가, 갔다가, 또다시 왔다가...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공상에 빠져 잡히지 않는 잡념들 속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한 분명하고 깨끗한 문장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고통은 산타 분장을 한 아버지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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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맥락도 없이 날아온 문장에 이게 뭐지 싶어 일단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머릿속 문장을 옮겨 적었다. 한 글자씩 옮겨질 때마다 더욱 선명해졌다. 하지만 왜 이런 문장이 나의 머릿속에서 나타난 것인지, 왜 이토록 선명하고 진실처럼 다가오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렇게 몇 분간 곰곰이 생각하다가 수첩에 이어서 글을 섰다.


고통은 산타 분장을 한 아버지가 아닐까? 어린아이는 산타 분장을 한 아빠를 알아보지 못하고 커다란 배, 지나치게 긴 수염, 억지스러운 '호호호' 웃음소리에 기겁을 하며 눈물을 쏟는다. 그럼 아빠는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벗은 뒤 아이를 다독인다. 그제야 아이는 아버지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기 위해 분장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른 집 아이들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 사람들은 어렸을 적에 산타할아버지는 텔레토비든 뿡뿡이든 분장을 하거나 탈을 뒤집어쓴 것들을 무서워했다. 불쾌한 골짜기 뭐 그런 거 같다.


어느 날에는 내가 우리 집 강아지 '비비'를 씻기는데 아주 큰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정확히는 매번 비비를 씻길 때마다 곤욕을 치른다. 왜냐하면 비비는 물을 아주아주 싫어하기 때문이다. 털에 물이 살짝만 닿아도 몸을 부르르 떨며 욕조에서 뛰쳐나가려고 발버둥을 친다. 평소에는 짖지도 물지도 않는 아주 순한 강아지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주인이고 뭐고 발톱으로 팔을 끓으며 탈출하려 한다.


IMG_2493.JPG 하얀 강아지 비비, 하얘서 그런지 쉽게 더러워진다.


하지만 뭐, 별 수 있는가, 더러워진 강아지를 그대로 둘 순 없다. 천천히 손으로 따뜻한 물을 뿌리고 간식을 주며 조심스럽게 씻기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와중에 간식은 잘 받아먹는다). 여전히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물에 젖어 볼품없어진 모습 때문에 그 감정이 더욱 강조된다) 나를 쳐다보며 왜 자신의 주인이 이러한 시련을 주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본다.


그 눈은 분명 '살려줘'의 눈빛이었다. 비비는 마치 내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물을 뿌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러한 산타와 비비의 이야기가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걸까? 둘이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가끔 이런 맥락도, 인과관계도, 무작위의 개념들이 서로 동시에 머릿속을 날아다닌다. 날아가다 부딪히고, 반사되고, 다시 한번 부딪히고, 그러다 서로 교차하는 순간이 올 때까지 영속한다.


두 개념의 교차점은 '고통은 당사자에게는 고통이지만 3자의 시점에서는 선물, 혹은 도움의 손길일 수 있다', '고통은 당사자를 죽이는 데에 목적이 있지 않다'.


예컨대, 페르시아의 한 시인이 말하듯 '정해지지 않은 날이라면 우주도 당신을 못 죽여', 그리고 팝스타가 부르는 '널 죽이지 못하는 것은 널 강하게 만들어'인 것이다.


방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 큰 시련이 왔었다. 무엇이냐 하면 지금까지 쓴 글이 전부 날아갈 뻔했다. 이러한 똑같은 일이 전에도 일어났었다.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은 안 나는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혹은 '죄와 벌' 혹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죄와 벌' 관련 글을 쓰던 때로 기억난다. 아마 그 글에 '방금 내가 쓰던 글이 전부 날아갔다'라는 내용이 적혀있을 것이다.


덕분에(?) 이번에는 그 시련을 무사히 넘겼다. 이전에 겪은 시련으로부터 배운 데로 이번에는 재빨리 글 전체를 복사를 해서 무사히 붙여 넣기를 할 수 있었다. 너무나 사소해서 우습기도 하지만 날 죽이지 못한 고통으로 더욱 강해졌다.


나에게 힘든 때가 다가오면 나 스스로 되뇌는 말이 있다. '이 고통은 날 죽이지 않는다', '내가 이 순간을 통해 배울 것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죽는다는 말은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닌 정신적인 완전한 패배를 의미한다. 언제부터 이러한 말을 스스로 되뇌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아마 '명상록'을 읽고 난 뒤라고 생각된다.


이 말이 나를 얼마나 많이 구해줬을까? 배은망덕한 나는 그 은혜를 세어본 적은 없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넘어진 수만큼 나를 구해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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