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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이구 Oct 11. 2021

자기 계발을 해야 하는 이유

크래빙 이론

요즘 들어 자기 계발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자기 계발서도 많이 팔리고 있고 여러 자기 계발 영상들이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내 주변에도 자기 계발을 하려는 사람이 더러 있다. 아주 좋은 현상이다. 현대 사회뿐 아니라, 수 천년 전부터 자기 계발은 선택사항이 아닌 필수요소였다. 자기 계발을 하는 사람은 생존확률이 높고, 윤택한 삶을 살고, 성공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자기 계발이 쉽지는 않다. 많은 사람이 중간에 포기하고 원래 상태로 회귀한다. 생물학적 욕구를 이성으로 조절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혹자는 "그거 좀 한다고, 인생이 바뀐다면, 누구나 다 그렇게 하지", "다 의미 없는 거야. 몸의 욕구를 따르는 게 자연스러운 거야", "너 자신이 바뀔 필요 없어, 그 모습 그대로 본인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하나하나 살펴보자.


"그거 좀 한다고, 인생이 바뀐다면, 누구나 다 그렇게 하지"

먼저, 인생이 바뀐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인생은 어떠한 큰 변곡점으로 변할 수도 있지만, 아주 사소한, 아주 작은 요소로도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다. 자기 계발은 인생의 큰 변곡점과 작은 변곡점 두 가지를 함께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설령, 큰 변곡점을 (대부분 운의 문제로) 얻지 못하더라도 작은 변곡점은 100% 얻을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큰 변곡점은 직업, 시험의 합격, 이성과의 만남, 성공적 투자, 외모, 그리고 건강 등이 있다. 작은 변곡점은 자아성찰, 자기애, 자존감, 자신감, 목표의식, 그리고 도전의식 등이 있다. 보통 우리가 자기 계발을 하는 이유는 큰 변곡점을 얻기 위함이다. 더 나은 외모를 얻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고,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공부하고, 더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 준비한다. 분명히 자기 계발을 전혀 안 하는 사람보다 자기 계발을 하는 사람이 이러한 큰 변곡점을 얻을 확률이 훨씬 높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자기 계발을 통해 성공한 위인들은 많지만, 자기 계발을 하지 않은 위인은 단 한 명도 없다.


하지만 이러한 큰 변곡점은 얻지 못할 수도 있다. 큰 변곡점은 아무리 자기 계발을 열심히 해도, 나보다 더 열심히 하거나 선천적 요건이 나은 사람에게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작은 변곡점들은 다르다. 이것은 모두가 얻을 수 있다. 또한 이런 요소들은 성공하지 못해도 충분히 얻을 수 있다. '어떻게 원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는데 작은 변곡점을 얻을 수 있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확실히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 긍정적인 감정을 얻기는 힘들다. 좌절감과 허무함에 파묻혀버릴 것이다. 하지만 꼭 기억해야 할 요소가 있다. 바로 자기 계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그 상황에서 포기해버린다면, 자기 계발은 거기서 끝이다. 자기 계발이 끝난 후에는 부정적 감정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자기 계발은 특정 목표를 이루기까지 기간을 정해놓고 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해선 안된다. 자기 계발의 목표는 '더 나은 사람이 된다'뿐이고 이는 우리가 죽기 전까지 지속해야 할 문제이다. 기억하자, 자기 계발을 하는 중에는 부정적 감정이 나오지 않는다. 긍정적인 감정만이 나오고, 그 긍정적인 감정은 우리의 인생을 바꿔준다. 단기적으론 별 의미 없는 것 같아도, 장기적으로 보면, 큰 변곡점보다 훨씬 큰 변화를 가져다준다.


그러므로, 단기적 목표를 이루지 못해도 계속해서 운동하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책을 읽고, 거짓말하지 말고, 칭찬하고 등등을 꾸준히 해야 한다. 이러한 사소한 성취감에서 자존감이 탄생하는 것이다. 큰 성취를 못해도 괜찮다. 하지만 꾸준히 사소한 성취는 매일매일 이루어 나가야 한다. 자기 계발을 하면 인생은 100% 바뀐다. 중간에 포기만 안 하면 된다.


"다 의미 없는 거야. 몸의 욕구를 따르는 게 자연스러운 거야"


이러한 사고방식은 유물론적 사고에서 유래되었다고 '인생이 허무할 때, 무기력증이 느껴질 때'에서 설명을 했다. 예를 들어, 자위행위는 유물론적 사고로 봤을 때 아무런 문제가 없는 행위이다. 건강에 문제가 된다는 연구결과도 아주 적고, 자위행위를 멈춘다고 해서 건강이 좋아진다는 연구결과도 딱히 없다. 생물학적인 차원에서는 당연히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머물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초월적 존재(위버멘쉬)로 인식을 해야 한다. 인간이 그저 한낱 동물로 보는 관점을 버려야 한다.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분류학적으로 동물일 수 있지만, 다른 동물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이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간은 지구 역사상 유래 없는 찬란한 문명을 일궈냈다. (출처: 에픽스 게임 시드마이어의 문명 6 )

인간이 동물과 가장 뚜렷이 구별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바로 과학과 종교이다. 지구에 존재하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에서 과학과 종교 비슷해 보이는 것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나마 과학과 비슷한 것을 찾자면 침팬지가 나무 막대기 들고 다니는 정도이다. 그나마 종교와 비슷한 것을 찾자면 동료가 죽었을 때 슬퍼하는 것 정도이다.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르다. 


인간은 과학과 종교를 이용해서 사회를 구성하고 문명을 건설했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명실상부 지구의 지배자이다. 신체적으로 연약했던 인간이 이제 네발 동물보다 빠르고 새보다 높게 날 수 있게 되었다. 도덕률을 제정하고 선과 정의를 행하기 위해 노력한다. 다른 생명체와는 비교 자체가 성립할 수 없을 정도이다.


과학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었고, 종교는 인간을 신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과학과 종교로 인간은 생물학적 신체를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가 되었다. 선택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생물학적 육체에 막혀 동물이 될지, 생물학적 육체를 뛰어넘어 동물을 초월한 인간이 될지 선택해야 한다. 몸의 욕구를 따르는 것은 동물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동물을 초월해야 한다. 인간이 되어야 한다.


"너 자신이 바뀔 필요 없어, 그 모습 그대로 본인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해"


이러한 사고방식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함정'에서 언급했듯,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론적 사고가 바탕이다. "틀렸다는 건 없고, 그저 다를 뿐이다", "본인의 안 좋은 모습도 인정하고 포용하여 자신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한다" 정말 감동 정이고 아름다운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냉철하게 말하자면, 결국 변화를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자신의 안 좋은 점을 고치지 않고 그냥저냥 살겠다는 것이다.

"그게 뭐가 문제야? 내가 그렇게 살겠다는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변화하지 않으면 본인이 본인을 사랑할 수 없다. 자신은 사랑하기 위해선 높은 자존감이 필수이다. 하지만 자존감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존감은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가만히 앉아서 변화를 거부하면 자존감은 절대 생기지 않는다. 우리의 몸이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자존감은 성취감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선 우리는 변화해야 한다. 당장 편하게 누워서 유튜브나 보면서 인스턴트 푸드를 먹으면서 허송세월 보내면 너무나도 좋지만, 결국엔 자존감 하락으로 이어진다. 


그 순간 우리는 악순환에 빠진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사회 속에 잘 섞이지 못한다.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만들기 어려울 뿐 아니라, 도피성으로 사회로 나가지 않고 방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런 사람이 연인을 만나 로맨틱한 관계(Romantic Relationship)를 가질 확률도 낮다. 설령 인간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쉽게 상처를 받고, 또 쉽게 상처를 주기 때문에 성인을 만나는 게 아니면, 인간관계가 유지되지 쉽지 않다. 설령 그게 가족이어도 말이다.


인간관계가 끊어진 개인은 극도로 불안해진다. 애초에 우리는 사회적 관계망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인간관계에서 실패를 겪은 우리는 자존감이 낮아진다. 낮아진 자존감은 또 다른 실패를 만들고, 그 실패는 더 낮아진 자존감을 초래한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실패하면 나중에 실패해도 더 나은 실패를 한다. 하지만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실패하면 중에는 더 참혹한 실패를 한다. 과연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자신을 사랑하고 싶으면 자기 계발을 해야 한다. 바뀌지 않는 자신을 사랑하다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허상이다.



내가 계속해서 생물학적 육체를 초월하고 동물이 아닌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나는 사람들이 계속 인간을 동물과 동급으로 취급하는 이유가 '안일함'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누가 봐도 인간은 동물이 아니다. 누가 봐도 인간은 동물과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정말 네발 동물이 될 거라는 상상을 하지 못한다. '짐승 같은 인간'은 존재할 수 있어도, '짐승인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는 안일함, '인간은 동물이 될 수 없어'라는 안일함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안일함'이다. 우리는 정말로 동물이 될 수 있다. 하루하루 쾌락을 좇고 이성적 판단을 배제한 체 누군가를 공격하는 것이 그 시작이다. 사람을 살해하고, 강간하고, 도둑질하고, 때리는 사람은 우리와 다른 괴물이 아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이길 포기하고 동물이 된 것이다. 동물이 될지, 인간이 될지는 순전히 우리 손에 달린 것이다. 


책 '죽음의 수용소'의 저자로 유명한 빅터 프랑클은 유대인을 참혹하게 학살한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이다. 그는 강제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점점 동물과 같아지는 사람들을 보았다. 동물과 같은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일상이 그들을 정말 동물과 같아지게 만들었다. 그들은 동료의 죽음, 잔인함, 참혹함에 무감각해진다. 이유 없는 혐오감과 적대감, 그리고 폭력성이 나온다. 빅터 프랑클은 이런 상황에서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높은 곳을 바라봐야 한다고 한다. 그것은 정의가 될 수도 있고, 종교가 될 수도 있고, 도덕이 될 수도 있고, 집에 남겨져 있는 가족이 될 수도 있다.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당신을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숭고한 목표의식을 심어줄 수 있다면 말이다.

비행기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선 알맞은 높이를 설정하고 그 높이를 기점으로 포물선을 그린다. 하지만 역풍이 불면, 조종사는 더 높은 지점을 향해 날아야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만약 역풍이 부는데도 원래 높이를 향해 날면, 그 비행기는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땅에 착륙을 하게 된다. 이것을 크래빙이라고 한다. 그저 안일하게 인간을 목표로 날아가면, 역풍이 불 때 짐승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더 나은 인간, 초월한 인간, 위버멘쉬를 목표로 날아가면, 역풍이 불어도 인간성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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