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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이구 Oct 17. 2021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꼭 피해야 할 것

노력 없는 보상 / 책임 없는 쾌락을 피해라

자존감이란 참 신비롭다. 높은 자존감은 개인의 잠재력을 극한까지 올려 성공적인 삶을 살게 해 줄 수 있지만, 낮은 자존감은 본인은 물론 타인의 잠재력과 가능성까지도 부정하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존감을 향상하기 위해 항상 노력하고 공부해야 한다. 자존감은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높은 자존감을 얻고 싶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높은 자존감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공부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높은 자존감을 얻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다. 또한, 아무리 높게 자존감을 쌓아도 단 한 번의 외부적/내부적 방해로 와르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단단한 사람이어도, 절망 한 번에 무너질 수 있다

자존감은 참 까다롭고 예민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도 자존감이 훼손되고 붕괴할 위험이 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번의 절망을 느낀다. 인간관계, 연인관계, 학업의 성취도, 업무의 성취도 등등 크고 작은 절망들을 경험한다. 결국 세상에는 절망을 느끼고 있는 사람과 절망이 곧 찾아올 사람,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는 것이다. 절망을 겪으면 자존감은 하락을 한다. 절망이 찾아오면 자신을 의심하고 다음 일에 적극적인 스탠스를 취하지 못한다. 그렇게 방치해두면 결국은 실패가 익숙해지고, 오히려 실패가 편해지는 상황까지 온다.


르케고르는 절망이 인간을 죽이는 질병이라고 주장했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절망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믿었다. 바꿔 말하면, 낮은 자존감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키르케고르는 자존감이 매우 낮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저주받은 존재라고 굳게 믿었다. 그의 형제자매도 마찬가지였다. 저주받은 가족에서 태어난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결국 그들은 대부분은 30살 즈음에 사망했다. 키르케고르 본인 조차 42살이라는 비교적 빠른 나이에 사망했다.


절망은 모두에게 필연으로 다가온다. 그렇기에 자존감 하락도 가만히 두면 자연스레 하락할 수밖에 없다. 의식적으로 우리는 자존감 향상해야 한다. 그럼 자존감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바로 성취감이다. 간단하다. 무언가를 얻음으로 생기는 성취감은 우리 자신을 쓸모 있는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어준다. 이는 자존감 상승으로 이어진다. 간단하지만 쉽지는 않다. 왜냐하면 성취감을 얻기 위해선 우리가, 정확히는 우리의 몸이 아주 좋아하는 일을 멈춰야 하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의 아버지, 키르케고르

그 일이란, 노력 없는 보상과 책임 없는 쾌락이다. 아직 감이 잘 안 잡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시를 들어보자. 자위행위, 담배, 술, 원나잇, 유튜브, 그리고 SNS 등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큰 노력 없이 큰 보상을 준다는 것이다. 대부분 손 하나 까딱으로 평소에는 느낄 수 없는 양의 도파민이 형성된다. 또 다른 공통점으로는 중독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얻어낸 보상은 개인이 얻어낸 것이 아닌, 그냥 주어진 것에 가깝기 때문에 성취감을 느낄 수가 없다. 


게다가 중독성강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 시간이 무시하지 못할 시간이 된다. 결론적으로, 노력을 통해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게 된다(그리고 이 과정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 중독성이 강하기 때문에 갑자기 해당 행동을 하고자 하는 충동적인 욕구가 생겨 생산적인 활동을 중간에 방해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예를 들어, 담배는 불 붙이고 빨면 즉각적인 보상이 주어진다. 하지만 책은 몇 시간에 걸친 지루하고 힘든 과정을 지나야 만 지혜와 지식이라는 보상이 주어진다. 담배를 피워본 적은 없지만 책 한 권을 읽고 새로운 지식과 지혜를 얻었을 때의 쾌락은 담배와 비견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최소한, 인생에 무엇이 더 도움이 되느냐 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말할 것도 없이 독서 쪽이다. 어느 것이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느냐 하는 관점에서 봐도 독서 쪽이다."내가 드디어 책 한 권을 다 읽었어!"라고 하는 사람은 있어도, "내가 드디어 담배 한 갑을 다 피웠어!"라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도대체 왜? 담배는 피우면 바로 기분이 좋은데, 같은 쾌락이라면 이게 더 좋은 거 아니야?"


이러니 인생이 허무할 수밖에 없다. 게임에서 치트를 쓰면 재미가 없는 것처럼, 노력 없는 보상은 인생을 허무하게 만든다. 담배를 피우면 인생이 허무해진다는 것이 아니다. 노력 없는 보상을 당연시하는 사상이 당신의 인생을 허무하게 만드는 것이다. 고통, 노력, 그리고 대가 없이 보상만 얻으려는 행위가 게임에서 치트를 쓰는 것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물론, 담배 한 번 피운다고, 자위 한 번 한다고,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하루를 보낸다고 바로 당신 자존감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적응해버린다.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보상들이 널려있는데 구태여 고생하면서 생산적인 활동을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생산적인 활동을 하고 있을 때, 우리 뇌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속삭인다.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야? 너무 지루해, 우리 좀 더 편하지만 더 많은 쾌락을 주는 행위를 하자. 잠깐 나가서 담배 한 개비만 피우자. 아니면 유튜브에 올라온 재미있는 영상 하나만 볼까?"라고 말이다.


노력 없이 주어지는 보상에 익숙해진 우리 뇌는 더 이상 목표를 위해 고통을 감내할 능력을 상실한다.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쾌락에 너무 쉽게 적응한다. 처음에는 아주 소량의 마약으로도 많은 양의 도파민이 분배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같은 양의 마약으로는 도파민이 전혀 생산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뇌를 계속해서 트레이닝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먼저 노력 없는 보상을 피해야 한다.


키르케고르도 20대에 대학에 들어가서 방탕한 삶을 살았다. 당장의 쉽게 얻을 수 있는 쾌락을 아다니고 미래 따윈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절망이 없어지지 않음을 느낀 키르케고르는 수도원이 들어갈 것을 고민할 정도로 쾌락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노력 없이 얻어지는 쾌락을 끊고, 사랑하는 한 여인과 깊은 관계를 이어갔다. 키르케고르 인생에서 가장 자존감이 높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노력 없는 보상의 또 다른 문제점은 목표와 의미의 부재이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목표가 얼마나 중요한지 '밤마다 불안감과 우울감이 찾아오는 이유'에서 설명을 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은 고통스럽다. 시험 100점을 받기 위해 죽기로 공부하는 학생처럼 말이다. 하지만 노력 없는 보상, 책임 없는 쾌락에는 고통의 과정이 생략되어있다. 목표와 의미가 생길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다.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이렇게 큰 쾌락을 주는데 인생의 목표를 향해 달려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은 고통스럽다

의미도 마찬가지이다. 솔직히 말해서, 술, 담배, 원나잇, 자위, SNS에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습관처럼, 본능처럼, 강박적으로 나도 모르게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의미를 없애기 위한 행위에 가깝다. 힘든 일을 망각하기 위해,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 술을 먹는다. 스트레스를 없애기 위해 담배를 피운다. 성욕은 풀고 싶지만, 깊은 관계는 피하기 위해 원나잇을 한다. 딱히 할 일 없으니 자연스레 핸드폰을 켜 SNS를 탐방한다. 의미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다.


목표와 의미가 중요한 이유는 목표와 의미를 향해 나아갈 때 우리는 수많은 긍정적인 감정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목표와 의미를 달성했을 때 느껴지는 성취감은 자존감의 향상으로 이어진다.


언젠가 뉴스에서 MZ세대의 특징 중 하나가 '편리 추구'라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더 쉬운 것을 찾고 편한 것을 찾는다는 것이다. 더욱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목표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기보단, '쉽다', '편하다'에 가치를 두고 의미를 둔다(사실 이 이야기는 MZ세대만의 특징이 아닌, 인간 전체의 특징이기도 하다). 필자도 MZ세대로서 공감한다. 나는 가장 편한 길로만 살았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행동했고, 오늘의 편리함과, 노력과 책임이 없는 보상을 누렸다. 그런 나에게 남은 건 자존감 하락과 불안감, 그리고 허무함 밖에 없었다. 미래가 너무 무서웠고,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너무 많은 시간을 노력 없이 보상을 얻는 행동에 낭비했고,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은 내 머릿속에서만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내 뇌는 이미 노력 없이 주어지는 쾌락에 절여진 상태였다.

경험한 바가 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상황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다. 100% 개인의 잘못이라고 하기엔, 시대적 상황도 있기 때문에 개인만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나 스스로도 벗어나려 노력하지만 아직 쉽지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빠져나와야 한다. 이건 생사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는 단호하게 말했다. 절망은, 낮아진 자존감은,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두 가지뿐이다. 노력 없이 얻어지는 쾌락을 멀리하고, 고통을 감수하면서 성취를 얻어내자존감을 높여 생존하거나, 그냥 키르케고르가 틀렸길 바라면서 평소처럼 쾌락을 위한 쾌락만을 쫒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알 것이다. 술에 취해 얻어지는 쾌락보다, 아침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가 산책할 때 느껴지는 쾌락이 훨씬 기분이 좋다. 원나잇으로 성욕을 해소하는 것보다, 거절과 갈등을 감수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깊은 관계를 유지할 때 훨씬 기분이 좋다. 하다못해, 라면도 집안에서 먹는 것보다 추운 날 밖에서 먹는 게 훨씬 맛있다. 고생 뒤에 얻어지는 보상이 훨씬 값진 법이다.


 그런 상황 자체가 나의 자존감을 올려준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 노력 없는 보상/책임 없는 쾌락을 꼭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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