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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이구 Apr 14. 2024

너 잘하고 있어

일기장

'하.. 무료하다'


나는 집에 혼자 있길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늘 재미를 찾아 움직이는 모순의 존재이다. 창 밖에 천천히 떠오르다 고점을 찍고 천천히 내려가는 태양조차 무료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만약 해가 빠르게 뜨고 지길 반복한다면 정신은 없어도 재미있지는 않을까?라는 멍청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괜히 책장을 뒤적거린다. 표지가 거의 뜯겨나간 삼국지, 몽당연필 몇 자루, 빨간색 색연필, 다 쓴 풀과 테이프, 어렸을 때 읽은 청소년 필독도서 몇 권, 오래된 필기노트 몇 권... 하나하나 괜스레 꺼내보고 펼쳐본다. 오래된 종이의 냄새는 추억의 냄새이다. 그 냄새만 맡아도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던 표지가 정체 모를 붉은 액체에 오염된 노트를 꺼낸다.


"제 일기장입니다. 읽지 말아 주세요."


 


꽤나 파격적인 서문.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문장이다. 내가 고등학생 때 쓴 일기장의 서론이다. 천천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글을 읽어 내려간다.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나의 고등학생의 하루가 지나간다. 일기를 읽으면 시간여행을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평범한 하루, 밖에 나간 하루, 친구들과 게임한 하루, 과제를 한 하루, 상처받은 하루, 생일, 룸메이트 생일, 다친 날, 회복한 날, 날이 좋은 날, 비가 온 날, 집에 벌레가 나타난 날, 또 다른 룸메이트의 생일, 화가 난 날, 배꼽 빠지게 웃은 날. 그리고 눈물을 흘린 날.


나의 시선이 멈춘 곳엔 답답함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눈물을 흘리는 고등학생의 하루가 있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대학교도 정하고 전공도 정해야 하는데, 전혀 갈피를 못 잡겠다. 애초에 난 왜 여기(캐나다)에 있는 걸까? 내 룸메이트들은 모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확고하다. 내 친구들 다 그랬다. 이게 뭐야. 나 혼자 나에 대해 모르는 것 같다. 나 왜 여기 있는 걸까? 모든 게 잘못된 것 같다. 과거의 내가 저지른 선택들이 하나씩 모여 지금의 나를 괴롭힌다. 나 어쩌다가 이 상황까지 오게 된 걸까? 내가 무언갈 잘못해서 신에게 벌을 받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나의 일기장에 적힌 글들은 많은 고등학교 3학년들이 겪고 있는 혼란일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사실하고 싶은 것들은 많았다. 전공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가장 먼저 철학과 심리를 배우고 싶었다. 당시에도 철학을 좋아했고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즐거웠다.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심리상담사가 되고 싶기도 했다. 중학생 때부터 소방관의 꿈을 몰래 꾸기도 했다. 하지만 늘 현실에 타협을 했다. 


유학생의 신분으로 타국에서 소방관이 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수많은 돈을 들여 유학을 하고 있는데 철학이나 심리학보다는 좀 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전공을 정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있었다.


나는 값이 매겨진 꿈을 꾸는 학생이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나 그 날의 일기를 읽고 있는 나는 빈 구석에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너는 OO대학교에 OO학과를 전공했어. 네가 배우고 싶어 했던 학과는 아니었겠지만 나름 재미있게 공부하고 있단다. 또 너는 글 쓰는 걸 좋아해. 글 읽는 것도 좋아하고. 네가 무슨 일을 하건 그건 상관이 없어. 그와 별개로 네가 하고 싶어 하는 일, 네가 했을 때 기분이 좋은 일이 생겼으니깐. 네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은 지금은 거의 다 해결되었어. 사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별일도 아니었지. 너 잘하고 있어."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위로의 편지다. 이 편지가 과거의 나에게 도착했을 리는 없지만, 왠지 위로를 받은 기분이었다. 동시에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하다. 늘 미래를 두려워하는 나이기에 꼭 필요한 말이다.


문제를 멀리서 바라보면 너무 거대하게 보인다. 마치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막상 지나가면 별 일이 아니었다. 한 문장으로 과거, 그리고 미래의 나에게 위로를 해주었다. 용기를 준다. 희망을 준다. 봄날의 채하같이 시원하면서도 따뜻한 생명이 넘치는 말. 나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말. 


너 잘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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