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보듯 너를 본다
"개인임무 분담제 실시해 주시길 바랍니다"
중대에 방송이 울려 퍼진다. 나는 이미 중대 분리수거장에서 쓰레기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분대 막내인 나는 개인임무 분담제 시간보다 늘 10분 먼저 나와있어야 한다. 가득 찬 쓰레기봉투를 묶어서 버리고,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고, 선임들이 가져오는 쓰레기를 받아 분리수거한다. 조명 하나 달려있지 않고 어두운 공간. 오직 먹다 남은 라면 국물 냄새와 상한 우유 냄새만이 존재한다.
허리를 숙이고 바닥을 쓸다 잠시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어보니 뻑뻑해서 잘 열리지도 않는 창문틀에 파란색 얇은 책이 올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쓰레기장에 버려진 시집이라... 왠지 마음이 사로잡혔다. 정확히는 동정심이 생겼다. 아름다운 글귀로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가져다주어야 하는 시집이 어쩌다가 이런 곳에 버려졌을까. 안타깝다. 사실 쓰레기장에 버려진 시집이나 그곳을 청소하고 있는 이등병이나 불쌍하긴 매한가지다.
개인임무 분담제가 끝나고 혹여 책의 주인이 나타날까 잠시 그곳에 잠시 머물렀다. 중대 분리수거장에 나와 버려진 시집 둘 밖에 없었다. 안의 내용이 궁금했지만 만약 선임의 책을 허락 없이 읽었다가 혼이 나면 어쩌지라는 이등병의 어리석은 두려움 때문에 멀리서 바라만 보았다. 창 밖으로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선임들, 점호시간이 되어가자 그제야 체단실에서 중대로 복귀하기 시작하는 말년 병장들을 지켜보았다. 하나 둘 선임들이 중대로 돌아오고 자신의 생활관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 누구도 버려진 시집에 관심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것을 들고 생활관으로 돌아왔다. 본래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채 버려진 시집. 내가 들고 온 것은 나 자신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무 생각 없이 휘리릭 펼친 페이지에 짧은 시가 나타났다.
기죽지 말고 살아봐. 꽃 피워봐. 참 좋아
그 짧은 시가 마음에 들었다. 그 시가 마음에 들어왔다. 어디서든 남의 눈치를 안 보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남의 눈치만을 보며 살게 되었다. 입대 후로는 당연하게도 더욱 눈치를 보며 살았다.
꽃 피운다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우리 모두 각자의 꽃이 있다. 밝고 당당한 해바라기, 매혹적인 장미, 화려한 나팔꽃, 순수한 민들레. 어떤 꽃을 피울진 모르지만 확실한 건 내가 오로지 나 자신일 때 피워낼 수 있다.
새싹이 꿀벌의 눈치를 보며 꽃을 피울까? 아니면 꽃을 피워냈더니 나비고 꿀벌이고 모이는 걸까? 나의 꽃은 어떤 꽃일까? 내가 오로지 나 자신일 때 나는 어떤 모습으로 피어날까?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임위적으로 떨어지는 의문에 의식이 점점 젖어가며 잠에 들었다.
이등병에서 병장이 된 시간에도, 그 이후로도 계속, 아직도 꽃을 피워내지 못했다.
그 시집은 전역할 때까지 나의 관물대에 꽂혀있었다. 전역 후에는 집에 들고 왔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
가만히 누워서 책장을 바라보면 이 시집이 딱 보인다. 마치 내가 쓰레기장에서 꺼내온 이 시집이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다. 꽃을 보듯 나를 본다고.
이후 대학교에서 non-fiction narrative story에 대해 공부할 때 교수님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스토리의 결말을 쓰는 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뭔가 교훈이나 기승전결에 맞게 결말을 지어야 할 것 같은데 제 실제 경험을 써야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제 실제 일어난 이야기에서는 교훈도, 기승전결에 맞는 결말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narrative story에서는 독자에게 교훈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기승전결이 명확하다면 좋겠지만 굳이 그 틀에 맞출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해 서술하면 됩니다." 교수님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narrative story의 목적이 무엇인가요?"
"길가에 피어난 꽃의 목적이 무엇인가요? 그것에 목적이 있나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 꽃을 보며 무언가를 생각하고 느낍니다. 잠시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힘을 불어넣어 주기도 하죠. 하지만 꽃의 목적이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꽃은 그저 그 자리에서 피어났을 뿐이죠."
꽃은 목적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무런 이유 없이 꽃을 사랑한다. 꽃을 바라보며 행복해한다. 어느 날 유튜브에서 어느 가톨릭 신부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먼 나라에서 와 시골의 한 병원에서 봉사하는 사람. 그는 분명 타인을 마치 꽃 바라보듯 보았다. 그 모습이 존경스럽기도 부럽기도 했다. 그 신부도, 신부 주변의 사람들도 행복해보였기 때문이다.
나도 타인을 꽃을 바라보듯 바라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내가 아닌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개념인지 조차 불확실할 정도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12세기의 한 영성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가장 높은 차원의 사랑이 '신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신을 사랑할 수도, 신이 명령한 타인에 대한 사랑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제야 수백 개의 열쇠가 달려있는 열쇠뭉치에서 열쇠구멍에 딱 맞는 열쇠를 찾은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을 꽃을 보듯 보려면 먼저 꽃을 보듯 나를 보아야 한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그 자리에 피어난 나를 이유 없이 사랑해야 하고 바라보았을 때 행복해야 한다.
나 자신을 꽃 보듯 바라보아야, 비로소 나의 꽃이 피어날 것이다. 확신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