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을 초월한 글
불안의 소리를 들었다. 귓가 주변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적혈구의 소리. 잠귀가 어둡기로는 가히 세계 최고를 자부를 하는 나 조차도 차마 무시하고 잠에 들 수 없을 정도의 큰 소리.
"어떻게 할 거야?" "어떡하지?" "너 잘할 수 있겠어?" "이제 어떡하지?" "모든 게 잘못됐어" "후회된다" "무언가 잘못되었어" "만약 이렇게 된다면..." "그래도 안된다면 어쩌지?" "그때에는 이렇게..." "그렇게 한다고 해도..." "아니야. 이건 아니야." "하지만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다면?" "잠깐 이건 어떡하지?" "모르겠어" "내일 찾아보자" "아니야 지금 알아야 해" "난 할 수 없어" "해야만 하는데" "몰라" "모르겠어" "그럼 어떡하지?"
누군가 나의 귓가에 쉴틈도 없이 속삭인다. 나와 같은 모습을 한 그 존재는 두려움에 덜덜 떠는 손가락으로 나의 얼굴을 감싼다. 나는 발 끝부터 머리카락 끄트머리까지 서늘한 열기에 달아오른다. 그 존재는 울상을 짓다가도 가끔 새어 나오는 웃음 참지 못한다. 결국 터져 나온 웃음에 본심을 이야기한다.
"넌 잠 못 자"
그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손으로 귀를 막아도, 베개로 머리를 감싸보았다. 당연하지만 효과는 전혀 없었다. 새벽 4시가 지나고 5시... 그러다 해가 떠오른다. 강렬한 빛을 뿜어내며 세상 모든 것들에게 이제 기상할 시간임을 알린다. 어두운 세상에 살던 모든 회색빛 물체들이 저마다의 색깔을 되찾는다. 오직 내 얼굴만이 회색빛이다.
"제발 잠을 자고 싶어요"
캐나다 출국을 앞두고 있는 나는 걱정할 거리가 많았다. 비자문제부터 시작해서 집 구하기, 복학 신청, 전공선택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지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미래에 대한 불안은 밤마다 충혈이 되도록 눈꺼풀을 잡아당겨 잠에 들지 못하게 했다.
나는 애니어그램으로는 미래형, MBTI로는 J, 나의 시간은 늘 현재가 아닌 미래에 머물렀다. 불확실함이라는 공포는 나에게 거대한 괴물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당시 나에게 찾아온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무엇하나 확실하게 그려놓을 수 없었다. 나의 손을 떠난 문제들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가만히 누워서 만일 일이 잘못되었을 때 세울 수 있는 Plan B를 세우는 것뿐이었다.
거대한 괴물이 나의 목을 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가축의 기분이었다. 여러 방법을 해보았다. 야밤에 운동을 하기도 하고, 수면유도 영상을 틀기도 하고, 지루한 우주 다큐멘터리를 보기도 했다. 그 결과 나는 무려 5시간 간 동안, 태양계부터 우리 은하, 수많은 별, 그리고 우주 전체의 탄생과 진행 등을 의도치 않게 배우기도 했다.
불면증으로 잠을 자지 못하자 몸에 여러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먼저 검지 손톱이 검매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기 시작했다. 몸과 목에 나기 시작한 두드러기들은 결국에 얼굴에 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따갑고 간지러워 잠에는 더욱 들지 못했다. 병원에 돌아다녔지만, '피부병은 원인을 알 수 없어요. 완벽한 치료제도 없습니다.'라는 좌절을 처방해 주었다.
날이 지날수록 눈그늘이 깊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천천히, 지쳐갔다. 몸과 마음이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정확히 몇 시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새벽에 책을 꺼내 읽었다. 혹시 책을 읽으면 잠이 오지 않을까 해서이다. 내가 꺼낸 책은 '명상록'이었다. 두껍지 않은 책, 거기에 적힌 글씨들. 약 2000천 년 전, 로마에서 적힌 글씨들이 말 그대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불안에 떨어 잠에 들지 못하는 한 청년에게까지 닿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알았을 끼?
모든 이들이 잠에 들었을 때, 나 혼자 노트를 펼쳐 필사하기 시작했다. 말장난으로, 필사적으로 필사했다.
어느 순간, 무언가에 의해 윗부분이 오염된 나의 필사노트에 한 글자, 한 글자 손으로 꾹꾹 눌러쓴 명상록의 글은 다음과 같았다.
미래를 염려하지 말라. 운명에 의해서 네가 그 미래로 가야 한다면, 너는 지금 현재에서 사용하고 있는 바로 그 동일한 이성을 가지고서 미래로 가면 되기 때문이다.
미래에 어떤 일이 올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건 지금의 '이성'이다. 이 이성을 잘 갈고닦으면 이 도구를 사용하면 어떤 미래에도 훌륭한 도구로써 나를 구해줄 것이다. 불확신 한 미래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확실한 나 자신의 역량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미래가 와도 능히 이겨낼 것이다.
과거로부터 시공간을 초월해 날아온 글귀가 미래에 머문 나를 현재로 데려다 놓았다. 말 그대로 시간여행이었다.
미래가 하나도 걱정되지 않았다. 아니 걱정되어도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여름에 더워서 고생할 걸 알지만 그것 때문에 봄날에 불안에 떨지는 않는다. 정말로 놀랍게도 그 순간 나의 불안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뒤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나의 은인으로, 내가 가장 존경하는 위인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물론 다시 정상적인 수면패턴을 지키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나의 불면증을 해결해 준 최고의 치료제는 명상록이었다. 말 그대로 말라비틀어져가는 나의 마음과 육체를 구해준 고마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