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자격
“아... 제가 글 쓰는 게 자신 없어서 그런데. 그냥 대신 써주시면 안 돼요?”
항공사 무료 자기소개서 첨삭 이벤트를 하던 당시,
정말 순진무구한 얼굴로 이 말을 내뱉던 지원자가 있었다.
아직도 얼굴도 이름도 또렷이 기억난다. 그만큼 그 날의 만남은 내게 충격이었으니.
처음엔 그 모습이 조금은 귀여웠던 것 같다.
자기소개서란 걸 처음 써본다는데 얼마나 두렵겠어. 그런 마음.
다만 소재가 있어야 글을 쓰고, 아무리 글을 못 써도 문장이 있어야 수정을 해줄 수 있으니 일단 소재 거리를 찾아보자 라며, 대화를 통해 자기소개서에 쓸 만한 스토리를 찾기 시작했다.
4가지 항목에 대한 주제와 근거 경험들을 잡은 후
“내가 1번 항목에 대해 문장으로 정리해볼 테니 학생이 2번 항목에 대해서 한번 써보세요. 그리고 서로 바꿔 읽어보고 수정할 부분들을 수정해봐요.”라고 이야기를 했다.
학생이 불편해할까 봐, 내 자리의 컴퓨터로 가서 글을 쓰고 돌아오니 2번 항목은 텅텅 빈칸이었다.
거의 40분 넘는 시간이었는데...?
1번 항목을 읽어보던 그 학생은 이렇게 얘기했다.
“아 근데! 저 1번에 쓰고 싶은 다른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들어보세요”
그 학생은 그렇게 20여분을 혼자 떠들었다.. 내가 참을성이 좋았던 건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좋은 소재이나 4번과 주제가 겹치니 그럼 4번을 다른 소재로 바꿔야 한다. 1번을 조금 수정해서 올 테니 2번을 써 놓고, 4번에 대해 다시 생각해라 “라고 자리를 떴다.
30여분 후 돌아온 2번 항목은 여전히 한 글자도 없는 ‘빈칸’이었다.
심지어 그 학생은 핸드폰으로 ‘00 커플 펜션’을 검색하고 있었다.
“왜 한 글자도 안 썼어요...?”라고 묻자 그녀의 대답이 진짜 해맑았다.
“아, 글로는 못 쓰겠는데 제 머릿속엔 다 있어요! 들어보세요! 재잘재잘재잘”
나는 당시.. 어쩌면....
부처님의 환생이 잠시 깃들었는지도 모른다......
후,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 나는
“그럼 지금 말한 걸 글로 써보고 있을래요? 정 글로 쓰는 게 힘들면 지금처럼 말하는 걸 그대로 적어도 돼요. 자기소개서 문장 형태로 바꿔주는 건 내가 할게요”
어쨌든 시간을 내서 첨삭을 받으러 왔으니 결과물은 돌려주고 집에 보내야겠단 생각에 나는 3번 항목을 쓰러 자리를 비웠고, 또 일정 시간이 지난 후 돌아왔다.
여전히 빈칸.
그녀의 변명은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드디어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던 것 같다.
참... 빨리도 깨달았다.
그리고 나의 마지막 배려심이 발휘됐다.
“그냥 말하듯이 써요. 00 씨 말 잘해요. 듣고 있으면 재미있으니까 그걸 그대로 써요. 정 힘들면 지금부터 생각하는 이야기를 핸드폰에 녹음해요. 녹음한 걸 들으면서 받아 적어요, 그건 할 수 있죠? 받아 적으면 제 자리로 오세요. 저도 3번 적어보고 있을게요”
나는 일부러 약 한 시간이 지나도록 그녀가 있는 강의실로 가지 않았고,
그녀도 내 제자리로 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내가 먼저 문을 두드리자,
그녀의 공채가 노트북은 여전히 빈칸이었다.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한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 저 3번에 진짜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나서 말씀드리려고 2번을 못 적었어요.
그리고 저 이제 30분 후면 가야 하는데 4번이랑 2번은 30분 안에 완성되나요? 두 시간 정도면 끝날 줄 알고 왔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요. 약속시간 다 됐는데?”
웃고 있는 표정과 달리 그 목소리엔,
‘ 왜 빨리빨리 안 써주고 내 약속시간 다 될 때까지 잡아놓냐’라는 약간의 짜증이 묻어났다.
문장이 없으면 고쳐 줄 수도 없다며 어르고 달래며, 메일로 보내면 수정해서 답장 주겠다고 하며 그녀를 학원 문까지 인도했다.
그 순간 결정타.
“근데 이렇게 말로 하는 게 좋은 거 같은데.. 하아.......... 내일 시간 몇 시에 되세요?”
롸...................?
나는 순간 사고 회로가 정지됐다. 그녀의 깊은 한숨이 내 얼굴에 어퍼컷을 날린 느낌이었다.
누가 봐도 명백한 K.O. 패.
입구에서 그 말을 듣던 다른 선생님께서 대신 폭발하셨는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일 또 오시려면 수업료 내셔야 돼요. 내일 약속시간 잡아드려요?”
그녀는 약간 의아한 표정과 무엇이 잘못됐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무료 첨삭 아니었어요? 아직 완성 안됐는데 돈을 받아요?”
세상엔 정말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깨닫게 된 계기다.
당시 나도 교육을 시작한지 얼마 안됐던 시점이고,
그래서 더더욱 첨삭에 대해 돈을 받는 것 보다는 무료로 첨삭을 진행해보며
다양한 학생들을 만나보자 라는 마음에 기획한 이벤트였기에 더욱이 당황스러웠다.
누군가는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료’일수록 가격이 ‘저렴’할수록 빌런이 많아진다는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그 말에 완벽하게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확률이 높아진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참 허무하고 허탈했다.
내 감정과 재능을 쏟아 사람에게 시간을 할애했는데 배반당한 느낌이 너무나도 싫었고.
스스로 교육자로서 자질이 있는 걸까 반문했다.
선생님이란 존재는 어때야 하는 걸까.
학교 선생님이라면,
이런 학생을 호되게 혼내고 바른 길로 이끌 수 있도록 인성 교육이라도 시켜주었을 텐데...
고작 학원 선생인 주제에 주제넘는 짓을 하지 말아야지.
아니다, 선생이란 이름은 그저 학생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 일뿐.
나는... 일개... 강사다.
그렇게 1,2년을 지냈던 것 같다.
소위 빌런 학생을 만나면
또 마음 아파하고, 우울해하면서, 학원 강사란 직업에 대한 자괴감을 느끼며.
지금 생각해보면 참 바르지 못한 자세다
그런 내게 참 가르침을 알려준 한 마디가 있었는데
바로 함께 일했던 승무원 선생님의
“저 학생은 나쁜 게 아니라, 아픈 거다. 미워하지 말고 내가 품어야지.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라는 말이었다.
그 선생님 역시 교육 분위기를 흐리는 학생들을 종종 마주하며 마음고생이 심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고민하고 고민해서 낸 결론이 ‘아픈 아이’로 생각하자 라니. 내겐 적잖이 충격이었다.
이후로 나 역시 소위 ‘빌런 학생들’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나쁜 건 미워할 수밖에 없지만
아픈 아이는, 함께 그 아픔을 치료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품으면 된다.
미워하면 나만 아파진다.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익히고, 학생들을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니
한 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람인지라, 종종 욱하는 성질을 감출 순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워하기보다는 측은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선생’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한 뼘 정도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