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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해 별글이 Nov 15. 2023

나의 가설을 마주한 날

하나하나 맞춰보니 가설이 증명되어 버렸다.

MMPI와 TCI결과를 분석받았다. MMPI 결과 우울지수와 신체화 증상이 히스테리, 자살사고와 함께 나타나고 있었다. 나의 능력에 대해 강한 회의감을 느끼고 스스로를 강하게 억압하며 그로 인해 형성된 낮은 자존감이 내가 바라보는 나였다. 우울증이 있을 줄 알았지만 의외로 높은 지수와 이외의 것들이 진심인지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나는 답하지 못했다. 나는 누구보다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단단한 착각이었다.


이어 기질 검사를 분석받았다. 인내력이 낮고 사회적 민감도가 높아 타인과의 관계에 예민한 기질을 타고났다고 한다. 인내심의 세부항목을 보며 부정할 수 없었다. 난 나의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 근면하지도 끈기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나의 근면과 끈기는 가족이나 친구 등 타인을 위해서만 작동되고 있었다. 첫인상이 '당황'이던 인내심 점수를 다시 보며 오히려 이 정도면 잘 받았다 싶었다. 곧바로 이어진 나의 성격에 대한 총평은 자신에 대한 이해나 수용이 낮은 반면 감수성이 예민하고 타인에 대한 수용과 공감을 잘하며 자기 초월적 성격이 강한 사람이었다.




문득 엄마의 잔소리 한 자락이 생각났다. 삼십 년 엄마 그늘에서 살던 그때 우리 엄마는 내게 늘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탈이다.”라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우리 엄마는 나란 존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나의 낱장 낱장을 모두 꿰고 있는 책실 같은 존재였다. 분노에 찬 고성으로 사람들 앞에서 헤실거리지 말라던 엄마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서 왕왕 울린다.

혼자 잘 놀던 어린 시절의 내가 종종 떠오른다. 그때 나는 혼자 생각하고 느끼는 시간이 즐거웠다. 특히 비 그친 날 세상을 가득 매운 고운 흙냄새를 맡으며 우리 집 베란다에서 놀던 때는 꽤 선명하게 떠오른다. 늘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했고 혼자 놀기 좋아하던 나를 우리 엄마는 친구 하나 못 사귀는 멍청한 딸년으로 정의했다. 또래 앞에서 눈물 콧물 다 빼는 나를 무섭게 붙잡고 다른 한 손에 새우깡 한 봉지를 들고 부족한 딸년에게 친구의 연을 맺어주기 위해 이리저리 끌고 다니던 엄마도 선연하게 기억난다.


"얘랑 놀아줄래? 그러면 아줌마가 이 새우깡 줄게."

모이면 놀기 바쁘던 그 시절 꼬마들은 새우깡만 홀랑 받아먹고 다시 자기들의 세계로 들어갔다. 우리 엄마는 영악한 것들이라 욕을 퍼부으면서 당신의 노력 대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는 나를 비난했다. 그래서였을까? 일찍, 아주 일찍부터 나는 세상에 내쳐진 별종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즐거운 친구들 속에 섞이지 못하는 이상한 별종.


단지 어리다는 이유로 강요와 통제 속에서 멸렬하게 성장한 나는 엄마에게 "친구도 못 사귀는 못생긴 백돼지" 라 불리며 사춘기를 맞았다. 선머슴 같다는 엄마의 환멸찬 잔소리를 묵묵히 견디며 머리를 짧게 자르고 여중 여고를 다녔다. 언젠가 중학교 선생님이던 엄마의 친구가 한 말은 진실이었다.

"숏컷 치는 이유가 친구들이 예쁘장한 머슴아 같다고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니가?"


맞다. 나는 친구를 못 사귀는 멍청한 내가 싫었다. 그리고 단발머리가 싫었다. 귀밑 머리를 하고 중학교에 갔던 첫날 "넌 정말 예쁘다"는 친구들의 칭찬이 내게는 수치스러웠다. 그래서 나의 중2병은 숏컷으로 점철된다.  나는 내가 가진 것들을 모두 부정하고 '친구들이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 점점 더 짧게 머리를 잘라버렸다.




유년기 때 연탄보일러가 있던 아파트 5층에 살았던 나는 연탄을 넣어두는 커다란 고무통 위에 올라가 낮이고 밤이고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낮에는 흘러가는 구름을, 밤에는 반짝이는 별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고무통에 올라 창 밖을 내다보면 위험하다는 엄마의 불안 섞인 화가 매번 하늘을 보겠다는 나의 의지를 확 꺾어버리긴 했지만. 나는 키 큰 어른이 되면 고무통에 올라가지 않아도 하늘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란 순수한 마음으로 빨리 어른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키 큰 어른이 되었다. 여전히 하늘은 멀지만 산호색 얇은 리넨을 덮은 듯한 저녁녘 하늘 위로 무람없이 빛나는 샛별을 보며 기진한 하루를 추스르곤 한다. 누군가가 아끼고 아끼는 반짝이 스티커를 점점이 붙어놓은 듯한 밤하늘과, 맹렬하게 쏟아지는 햇살을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떠다니는 구름을 사랑한다.


우연히 펼친 책 속에서 나와 비슷한 주인공을 발견했을 때 별종인 나도 이 땅에 살아도 되는 존재의 자격을 얻은 것 같은 위안을 얻으며 어른이 되었다. 인연이란 소중한 단어로 이어진 사람들이 쏟아내는 감정에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며 마음을 주고받았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내가 누구인지 몰랐다. 눈앞으로 보이는 내 모습이 전부라고, 뒤는 보이지 않는다는 알리바이로 무지를 당연시 했다.


철저하게 외면한 탓이었을까? 처음으로 정량화된 나를 마주한 날, 스스로와 연대하지 못하는 인간의 타고난 능력이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 수용이라는 총평은 내가 모순덩어리 그 자체임을 고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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