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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Oct 16. 2024

육개장

새댁에서 헌댁이 된 사연

 너불거리는 치맛자락 닮은 양지를 펼치며 생각한다. 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불 조절을 잘하자. 고기를 삶을 때면 종종 넘쳐버린 육수가 불을 잡아먹는다. 이를 다 닦아내야 화구가 켜지니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넘쳐버린 육수와 함께 터지는 화도 모두 내가 닦아야 하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잠깐 그 앞을 지키는 게 낫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양푼에 차가운 물을 받아 펼친 고깃덩어리를 담근다. 물은 금세 투명한 선홍 빛깔이 된다.   


 핏물이 빠지는 동안 우리 집에서 가장 큰 냄비를 꺼낸다. 3리터 물을 받아 억센 솔로 박박 문질러 뿌리 밑까지 하얘진 파를 냄비에 욱여넣는다. 양파는 여러 겹 중 깨끗한 껍질 한두 장을 남기고, 꼭지를 제거한 통마늘 열댓과 함께 입수. 통후추는 많이 넣으면 쓴맛이 나니 예닐곱 알이면 충분하다. 무 한 덩어리, 마른 다시마 한 장은 있으면 넣고 없으면 말고. 향신 채 위로 고깃덩어리를 얌전히 내려놓고 그 위로 레몬즙 두 숟갈을 휘두른 뒤, 뚜껑을 덮고 가장 센 불을 댕긴다. 한 시간이 지나면 끓어대는 뽀얀 육수 속에서 향긋한 향을 입은 양지가 고소한 자태를 드러낸다. 


 잘 삶아진 양지와 뽀얀 육수는 다양한 음식이 될 수 있다. 초록의 꽈리고추와 찢은 고기를 조려내면 두고두고 꺼내 먹는 장조림이 되고, 통통하게 불은 미역과 다시 푹 끓이면 삼신할머니도 좋아하는 미역국이 된다. 아파서 기진한 식구가 있을 때는 불린 쌀을 달달 볶아 다진 채소와 함께 소고기 죽으로, 새해 아침에는 노랑, 하양, 초록, 검정, 빨강, 오방의 구색을 맞춰 떡국으로 만든다. 


 모든 음식은 그에 맞는 목적으로 차려낸다. 하지만 양지 육수로 끓여 내는 육개장에는 남편을 오롯이 내 손맛의 노예로 만들겠다 마음먹은 십사 년 전 새댁의 큰 야망이 담겨있다. 손이 서툴던 신혼 시절, 새댁이 밥상을 차릴 때면 남편은 배가 아프다며 슬그머니 숟가락을 내려놨다. 순진했던 새댁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걱정을 한 아름 안고 살았다. 


 혼자 사시던 시어머니와 합가 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어머님은 양지를 푹 고아 끓인 육개장을 끓였다. 그리고 남편은 정신없이 퍼먹었다.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남편은 누구와 더 오래 사는지에 대한 계산이 되지 않았던 걸까? 앞뒤 분간도 못할 만큼 꽤 오래 배가 고팠던 걸까? ‘별 맛도 없는데 그렇게 맛있냐?', 무심한 소리가 툭, 세상에 나왔을 때 어머님의 양쪽 어깨에선 눈부신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속도 없이 내 입에도 맛있었던 그 육개장. 배신감은 한층 가중되었고 나는 눈물을 삼키며 밥을 먹었다. 그리고 그 오묘한 삼각관계의 승자가 되겠다,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인생이 계획대로 될 리 없다. 기다리던 첫 아이가 생기고, 육아에 전념한 사이 마음을 접은 둘째가 태어나는 과정 속에서 한동안 나는 '엄마'가 되기 위해 악전고투하며 살았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아이 둘이 자라는 동안 나는 이유식을 만들기 시작했고 남은 재료로 볶음밥을 만들었다. 그 미미한 시작도 한 해 두 해 쌓이며 솥뚜껑 운전 경력으로 이어졌다. 그 사이 어머님은 아우라를 잃어버리셨고, 나는 어머니의 소고기뭇국과 남편의 육개장을 동시에 끓이는 전문 살림꾼이 되었다. 

 요즘처럼 남편 두 어깨가 땅 끝까지 내려가 있으면 나는 양지와 육수로 얼큰한 육개장을 끓여 낸다. 손질된 고사리와 토란 줄기, 느타리버섯과 숙주, 대파에 고춧가루와 세 가지 액젓을 넣어 조물조물 무친 후, 육수에 넣고 샌 불에 올린다. 온 집안에 그득히 차오른 구수하고 칼칼한 냄새는, 퇴근 후에도 차마 회사 일을 잊지 못하는 남편의 시름을 덜어주고 식욕을 불러온다. 곁들여 먹기 좋은 나물 반찬 몇 가지와 상을 차리면 남편은, 그 어떤 융숭한 차림상 앞에서도 볼 수 없는 얼굴로 수저를 든다. 배 아프다는 핑계로 슬그머니 밥 수저를 놓던 피노키오 이제 안녕.

 

 뜨끈한 육개장에 배가 불러오면 마음에 들어찬 짐이 부대껴오는지 남편은 하나, 둘 밖에서 있었던 일을 꺼낸다. 비워진 그릇을 앞에 두고 자신의 하루를 나눠주는 남편의 소리를 가만히 듣는다. 귀 기울여 듣는 것만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남편은 들어주어 고맙다며 자리를 턴다. 제 자리를 찾은 남편의 어깨를 보며 집밥은 자존감 회복제라던 정혜신 선생님의 문장이 떠올랐다. 그래서 내가 그 뜨거운 불 앞에 서있지.

 

 한참 육수가 끓어오르던 오후, 잠시 자리를 뜬 사이 공교롭게 육수가 끓어 넘쳤다. 씨근덕거리며 화구를 닦아 내며 생각했다. 한 번은 끓어 넘쳐야 제게 맞는 불을 찾을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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