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다시 먹고 말 거야!
날씬하고자 하는 욕망이 먹고자 하는 마음을 이기는 나도 포기하지 못하는 군것질이 있다. 바로 초콜릿. 꼭 필요한 때가 있어 우리 집 냉동실에 상비약처럼 준비되어 있다. 그 ‘때’란 나의 하루 24시간을 통틀어 강도 높은 노동이 집중되는 시간, 바로 오후 다섯 시다. 이 시간이 되면 첫째 아이의 하루 일과가 끝나며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저녁 메뉴를 결정하고 늘어지는 아이들을 일으켜해야 할 공부를 종용해야 하는 때.
초등학생에게 공부 란 매일 혼자 예, 복습하며 탐구 방법을 체득하고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일상을 잡아가는 힘을 키우는 훈련이다. 당장 수학 문제 하나 더 풀고 덜 풀고는 의미가 없다. 혼자 해낼 수 있을 만큼의 선행과 깊게 탐구할 수 있는 복습을 통해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가르고 공부 방향과 목적을 스스로 파악하는 게 초등학생 집 공부 목표다. 그러나 피아노 레슨을 받고 돌아오면 쉬고 싶어 하는 큰 아이. 숨 돌릴 틈을 주면 해야 할 그날의 공부를 미루며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무한정 늦어진다. 나는 아이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을 구분하고 스스로 욕구와 시간을 조절할 줄 아는 어른으로 자라길 바란다. 그래서 오후 다섯 시가 매우 중요하다.
하기 싫은 아이의 마음과 내 육아철학이 충돌하는 이 시간이면 나는 정서적 허기를 많이 느낀다. 아이에게 완벽하게 메시지가 전달될 때까지 언성 높이지 않고 같은 말을 해야 하니까. 기쁨이든 분노든 감정을 분출하지 않고 내 안에 잡아두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꾹 참다 보면 몸에선 당을 보충하라고 신호를 보내온다. 초콜릿. 냉동실 상비약은 그때 내게 요긴한 당 수혈을 선사한다.
프랑스 여자들은 초콜릿이 먹고 싶으면 조각 당 3~4만 원 하는 수제 쇼콜라를 카페에서 음미하며 먹는다고 들었는데. 찰나의 오전을 학교에서 보내는 둘째와 낮을 보내고 업무량이 집중되는 오후 시간을 살아내야 하는 대한민국 주부에게는 그야말로 남의 나라 이야기. 쓴 카카오가 설탕, 버터, 우유 덕에 부드럽고 감미로운 초콜릿으로 거듭난 것. 그것이 영하 십 팔도 씨에서 아주 딱딱하게 얼어 있다면 충분하다. 딱! 초콜릿을 조각 내 입에 넣으면 오도독 씹히는 달콤한 쾌감에 얼른 호랑이 기운이 솟는다.
그러나 긴급 당 수혈이 요즘은 여의치 않다. 턱이 좁아 치열이 고르지 못하고 치간이 매우 좁은 내 이빨엔 치간 칫솔이 들어가지 않는다. 덕분에 눈에 보이는 제일 바깥쪽 어금니가 썩었다. 치석이 하나도 없을 만큼 양치질을 열심히 함에도 사이에 낀 이물질을 결국 제거하지 못했나 보다. 게다가 출산 후 산후조리 과정에서 꽁꽁 언 떡을 이빨로 깨문 적이 있는데 그 뒤로 내 치아는 모두 시린 이가 되었다. 얼음 한 판을 와작와작 씹어먹어도 튼튼했던 이빨인데. 이제는 한여름에도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먹어야 할 만큼 고생하고 있으니 얼음을 즐겨 씹던 내가 진짜 있긴 했나 의뭉스럽기까지 하다.
시린 이는 온몸 구석구석에 난 털을 들었다 놨다 한다. 기분 나쁜 그 감각은 어느 날 새 부엌칼을 쥐고 룰루랄라 음식을 하다 슬쩍 베었을 때 드는 느낌과 닮았다. 그럼에도 막상 치과에 가려니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나이 사십 넘어 먹어도 치과는 여러모로 무서운 곳이다. 일단 대기가 너무 길고, 비용이 많이 들며, 이빨 치료 과정에서 발생하는 통증과 수치를 감당하기 어렵다. 스무 살 때 때운 아말감은 보기 흉한데 저걸 떼어낼 작업은 상상만 해도 버겁고.
특히 둘째가 초등학교 입학한 뒤로 정오를 기해 엄마로 변신해야 하는 애데렐라의 삶을 사는 내게 북새통인 치과 대기는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다. 치과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은 지 치과 앞에서 돌아 나온 적도 여러 번. 치통으로 턱을 감싸 쥐고도 ‘아이가 조금만 더 큰 뒤에 치료할까?’ 하는 미련한 생각만 든다. 그래서 나는 밤이면 판타지를 쓴다. 내일 아침에 눈뜨면 내 이빨이 멀쩡해지는 판타지를.
그러나 치과에 가지 않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썩은 게 쪽팔리고 시간이 없다는 건 다 핑계일 뿐, 마음이 멀리 가서 목돈이 들만큼 큰 치료가 필요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한다.
‘그렇게 돈 들여서까지 고쳐야 하나?’
결국 진료를 미루는 건 내 깊은 마음속에 아직 남은 존재의 무가치함 때문이었다.
아픈 이 때문에 내 인생이 비상사태다. 어느 날 얼려 둔 초콜릿을 오도독 소리 나도록 씹어 삼킨 뒤로 치통은 더욱 깊어져 버렸으니까. 초콜릿 말고는 내 육아체증을 내릴 명약이 없다. 첨가물이 다 덮지 못해 남은 달콤 씁쓸한 맛이 인생을 닮은 초콜릿. 육아가 주는 분노와 기쁨은 초콜릿의 위안이 아직 필요하다. 섞일 수 없는 극단으로 혼란스러울 때 감정의 유화제가 되어 줄 테니까.
여든여섯 어머님의 말을 빌리자면 죽기 전까지 자기 이빨로 먹을 수 있는 게 괜한 오복이 아니다. 그러니 나 스스로를 평가절하하며 치료에 대한 필요를 고민하지 않아야 한다. 살아 있는 나에게 예를 다하는 방법은 나를 잘 돌보며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일 테니까. 더는 스스로 구박하지 말고 부끄러워 말고 창의적인 핑곗거리를 만들지 말아야지. 그리고 치과 치료가 끝나는 날 남의 나라 여자들처럼 비싸고 맛있는 수제 초콜릿을 먹으러 가야겠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해 준 나를 응원해 주기 위해.
돌아오는 월요일, 치과에 전화해서 예약이 가능하냐고 물어봐야겠다. 그래도 내일 아침엔 치통이 사라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