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가족이 되어간다.
가느다라 한 빛이 눈을 간지럽혔다. 피곤했던 몸을 일으키자 뿌연 시야에 방이 낯설다. 여기가 어디 더라?
“아이고, 큰일이다!”
바로 눈앞에 시계가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열 시. 올해 서른이 된 조카 침대에서 잠이 깬 시간이다.
눈을 뜨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며 거실로 나갔더니 그 시간까지 나만 자고 있었다. 다행히 아주버님은 새벽 여섯 시에 텃밭으로 나갔다고 하신다.
“왜 안 깨웠어!”
형님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부엌을 보며 남편을 원망하니 싱긋이 웃고 만다.
“배고프지? 빨리 앉아서 아침 먹어. 내 마음대로 샌드위치 만들었는데 입에 맞을지 모르겠다.”
눈으로 욕하는 걸 들으셨나? 형님은 나를 식탁으로 불러들였다.
눈앞에 놓인 접시에는 싱싱한 토마토 슬라이스 세 조각, 상추 한 장이 곡물 식빵 위에 놓여 있다.
“밭에서 우리가 키운 토마토랑 상추야. 맛은 모르겠는데 싱싱해.”
코끝이 동그란 둘째 형님 웃는 얼굴은 어머님을 쏙 빼닮았다. 늦잠 잔 올케가 된 나는 유감스러운 마음을 잔뜩 안고 칼과 포크를 들었다. 새침한 성격이 아니기에 시댁 식구들 앞에서는 더없이 조심하는 나. 오픈 샌드위치를 손에 들고 한 입 베어 물면 게걸스러워 보일까 봐 도구를 들었다.
발사믹 소스로 간을 맞춘 토마토와 상추 밑에는 계란 프라이 하나와 블루베리 잼이 숨어있다. 새콤달콤한 맛의 출처가 남다른 샌드위치가 내 시댁 식구들을 닮았다. 결혼 전, 절대 함께 살 일이 없다던 시어머님과 남편. 하지만 결혼 후 다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상추 밑에 숨겨 둔 계란과 블루베리 잼처럼 그들은 어쩌면 결혼만 성사되길 바랐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사단의 가장 큰 원흉은 촌스러울 정도로 순수했던 나다. 열악한 다세대 주택에 연로하신 시어머님이 혼자 사시는 게 나는 마음에 걸렸다. 형님들은 두 말씀 없이 살림을 정리해 우리 신혼집으로 보내셨고 남편은 고맙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결혼 후 여섯 달이 지난날이었다.
시어머님을 모시고 사는 며느리에게 공식적인 시댁은 없다. 대신 시누가 셋이다 보니 어정쩡한 시댁 유사 댁이 있다. 일 년에 한두 번. 딸들 만나러 출타를 가신 어머님을 모시러 갈 때 나는 형님들 댁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 오랜만에 만난 동생과 누나는 밤새 수다가 끊이질 않고 어머니가 추임새를 맞추시니 틈이 없는 자리. 남편이 원가족과 화목한 시간을 보낼 때 모호해지는 내 역할이 불편해 날짜가 다가오면 잠 못 드는 날이 많았다.
밥을 차릴 때도 먹을 때도 매 한 가지. 앉아만 있기엔 좌불안석이고 부엌으로 가기엔 이미 다 차려진 밥상. 흉하게 보일까 봐 먹고 싶은 것도 참으며 눈앞에 보이는 것만 먹고 재빨리 일어난다. 설거지라도 해야 하니까. 안 한다고 눈치 주는 사람 없는데 한다고 말리는 사람도 없으니 이 모든 상황이 혼자만 불편하다. 왜 이렇게 나만 불편할까? 어머님 모시며 살고 있는데 대접 좀 받아도 되지 않나? 뜨끈한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마음을 품고 집으로 내려오면 애꿎은 신용카드만 긁어 대며 분출을 막았다.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외사촌 언니의 유년시절은 겉으로 드러나던 상황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내게는 그토록 다정하던 외할머니가 알고 보니 지독한 시어머니였다. 툭하면 밥상을 엎었고 그때마다 외삼촌은 외할머니 편을 들었다. 우리 엄마는 그런 외할머니를 구박하면서도 외숙모를 미련한 곰이라고 흉봤다. 지독한 시집살이에 마음의 병까지 얻었음에도 늘 소박한 웃음으로 나를 맞아 주시던 외숙모. 고부갈등이 부부문제로 번지고 이를 말리던 얄미운 시누가 있던 우리 외가 사정을 알게 된 나는 결혼하고 처음으로 외숙모, 올케라는 호칭으로 불릴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형님들과 남편, 시어머니는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내 뒤에서 속닥속닥 흉볼 거란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
그럴만한 사건도 있었다. 시어머니와 살림을 합치고 얼마 뒤, 결혼하고 처음으로 맞이한 추석에 친정으로 가기 위해 교통편을 알아볼 때였다.
“올케, 나야.”
나와 열아홉 살 차이 나는 큰 형님의 전화에 마음이 바싹 얼어붙었다.
“추석 때 부산에 내려간다는 말 들었어. 결혼하면 출가외인인 거 몰라? 명절에 친정 갈 생각 말고 집에서 엄마랑 지내.”
그때 촌스러울 정도로 순수했다고 내가 말했던가? 나는 한 마디 대꾸도 못하고 굽실대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전화해 이혼하자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큰 형님은 자신보다 열아홉 살이나 어린 나를 날라리 꽃뱀으로 여기셨던 것 같다. 어머님 집을 팔아 구한 전셋집에서 내가 함께 살리 없다는 전제를 깔고. 그러나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나는 생각보다 어머님과 잘 지냈다.
“애를 안 낳으니까 자꾸 아프지!”
가뜩이나 임신이 안 되어 스트레스받는 내게 돌 던지는 말을 하곤 하셨지만. 그럴 땐 남편의 멱살을 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어머님은 아셨을까? 당신 말 한마디에 아들이 천당과 지옥을 오고 간 것을.
한편 시댁과 합가를 실패한 큰 형님은 더 이상 내게 간섭하지 않는다. 가끔 뵐 때면 신경 곤두서는 말씀은 여전히 하시지만. 어머님을 뵈러 오셨을 때 애 터지게 밥상 차린 나를 앞에 두고 어머님께 설거지하지 마시라, 신신당부하셨다.
“걱정 마세요. 형님 동생이 다 할 거예요.”
나는 웃으며 큰 형님 신경을 시원하게 긁어드린다.
나는 올케, 외숙모가 되었다. 아침 열 시에 일어나 눈곱을 주렁주렁 달고 식탁에 앉는 그런 올케와 외숙모. 둘째 형님은 내가 탐내는 커피잔 세트에 정성스럽게 내린 커피 한 잔을 내밀며 샌드위치와 함께 먹길 권했다.
“커피 진하면 물 타서 마시고. 샌드위치는 입에 맞아?”
가까스로 눈 뜨는 데 성공한 나는 형님을 바라보며 웃음으로 대답한다. 입 안 가득 새콤달콤한 샌드위치가 들어있었으니까.
그날 내 샌드위치는 곡물빵 위에 계란 프라이 한 장 블루베리 잼과 청상추, 토마토, 발사믹 소스까아지. 세상 본 적 없는 조합이었다. 어울릴까 의심했지만 켜켜이 쌓아 올린 재료들은 이상하리만큼 조화로웠다. 오랜 시간 부딪혀가며 서로를 알게 된 나와 시댁 식구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