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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Oct 23. 2024

미역국

엄마가 되어가는 나를 위한

 “아우… 진이 쑥 빠지네.”

일상으로 돌아온 아침. 텅 빈 아이들 자리를 고요가 차지했다. 여행과 잔치의 긴장이 비로소 풀어진 순간. 나는 땅속으로 흘러드는 한 줄기 물이 된 것만 같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 생일을 전후로 여행을 다녀온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목적이랄까? 올해는 바쁜 남편을 집에 남겨두고 아이들과 나만 제주도로 떠났다. 나흘의 밤과 닷새의 낮. 오백 킬로미터를 달리며 제주의 가을을 만끽하고 맞이한 첫 번째 월요일이자 아들의 생일 아침이었다. 

 좋은 날 친구들 비위를 맞추며 망치기 싫다던 큰 아이가 어쩐 일로 올해는 생일잔치를 하고 싶다고 했다. 생일은 여행이 끝나면 돌아오는 월요일이었다. 평일엔 다들 학원 스케줄로 바쁜 탓에 일요일로 잔칫날을 정하고 토요일 오후 다섯 시에 대전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예매했다. 그러니까 탄생 기념 여행을 하고 돌아온 다음 날 잔치를 하고 진짜 생일을 맞이하는, 그야말로 큰 아이 생일 주간이었다. 


 남편은 이 계절이 특히 바쁜데 올해 가을은 비상사태 수준이다. 주말도 반납하고 회사를 나가야 하는 남편. 때문에 일곱 명의 초등학생 손님을 치르는 일은 고스란히 내 몫이 되었다. 마음은 양지 육수 진하게 뽑아 삼신할매도 좋아할 미역국을 끓여 한 상 차려 먹이고 싶은데 어쩐지 몸을 침대에서 일으키기도 어렵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뿌링클 치킨과 피자를 주문하고, 간단하게 떡볶이와 어묵탕을 끓였다. 


 “우와, 맛있는 거 엄청 많다!!”

취향 저격 제대로 해서 받는 칭찬을 기쁘게 받는다. 먹고 마시고 놀며 신난 아이들은 저녁까지 먹겠다, 내일 아침 우리 집에서 등교하겠다며 드러누웠다.

“안돼. 이제 일어나서 집에 가. 나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해.”

오래 만난 큰 아이 친구들은 초대보다 보내는 게 일이다. 


 누군가의 생일엔 양지를 푹 삶아 미역국을 끓이는데 샛별 배송으로 받을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에 고기 구매할 때를 놓쳐버렸다. 끓이지 말까? 고민하다 알람을 여섯 시에 맞추고 진한 멸치 다시마 육수를 준비한다. 육수용 멸치 한 줌을 넓은 접시에 잘 펴서 전자레인지 넣는다. 딱 십 초 돌려 멸치가 머금은 수분을 날리고 커다란 다시마 한 장을 준비한다. 물이 팔팔 끓으면 불을 끄고 멸치와 다시마를 넣어둔다. 세상이 잠든 사이 맹물은 진한 멸치 다시마향을 품은 육수가 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멸치와 다시마를 건져내고 채반에 걸러 맑은 육수를 준비한다. 미역은 바득바득 씻지 않고 오래 불리지 않는다. 찬물에 잠깐 몸을 푼 미역을 바로 건져 액젓에 조물조물 무친 다음 육수에 바로 넣어 끓인다. 엄마에게 전수받은 이 비법은 끓이면 향긋한 미역향이 올라오며 개운한 맛을 자랑한다. 하얀 찹쌀에 소금 작은 한 스푼 넣어 지은 찰밥과 함께 소박한 생일상을 차린다. 


 “엄마,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큰 아이는 오늘도 어김없이 내게 큰 절을 하고 식탁에 앉았다. 찰밥 한 숟갈에 미역국 한 숟가락. 미역이 명주 실타래 풀리듯 끊임없이 올라온다. 생일에 먹는 미역은 길어야 한다고 가위를 대지 않은 내 탓이다. 장수를 바라는 어미의 마음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아들은 불평 없이 그 미역을 입안 가득 넣는다. 정말 맛있다고, 끓여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는다. 여낙낙한 눈웃음을 남기고 학교로 떠난 아이. 그 아기자기한 소란이 고요로 대체된 순간 나는 진이 빠졌다.  


 “아직 세 시간밖에 안 지나서 그래.”

나를 가만히 안아주는 남편. 나는 일어난 지 두 시간밖에 안 됐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며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오늘 겸이 엄마가 된 날 이잖아. 십이 년 전에 말이야. 스물일곱 시간 진통하다가 새벽 다섯 시에 낳았으니 지금 진이 빠질 시간이지.”


 긴장이 풀어지고 봉인된 여독이 새어 나와 기진한 줄 알았는데. 십이 년이란 세월이 지났음에도 몸은 여전히 그날의 산고를 기억하고 있는 걸까? 출산이 예정일보다 열흘이나 늦어지면서 유도분만을 해야 하나 제왕절개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우리에게 아들은 이제 나가겠다, 신호를 보냈다. 초산에 산도가 잘 열리지 않아 스물일곱 시간이 걸렸지만 아이는 건강한 몸으로 무사히 내 몸에서 빠져나왔다. 3.66킬로였나? 머리 둘레가 어마어마해서 죽을 뻔했지. 그 고생 때문에 내 몸은 코끼리만큼 부어버렸고 아들은 홍당무처럼 삐죽하고 검붉은 얼굴로 세상에 나왔다. 아기가 못생겨서 실망한 나는 이제 뱃속에 미역양식장이 생길 때까지 미역국을 먹어야 한다고 억울해한 철딱서니였다. 

 남편 말 한마디에 설렘과 걱정,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던 복잡한 감정 속에서 엉겁결에 엄마가 된 그날이 머릿속에 흘러갔다.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잘 못 하고 있을 수 있다는 의심, 사랑스러우면서 성가신 존재에 대한 혼란스러운 마음이 함께 재생됐다. 엄마가 되어간다는 말은 어쩌면 이 혼돈의 카오스를 뚫고 생명의 경이에 감동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 아닐까? 나같이 철없는 사람도 내 키만큼 자란 아들을 보면 생명이 가진 경이로운 힘에 경탄하며 감사한 마음이 생기니까. 그 감사한 마음이 한 해 한 해 자라나 성숙한 엄마가 되어간다. 방금 전까지 내 앞에 앉아 미역국을 맛있게 먹던 아들을 떠올리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끓이지 말까 고민했던 아들 생일 미역국 앞에서 결국 눈물을 쏟았다.

“아, 그렇구나. 내가 출산한 날. 그럼 애들 생일날 미역국을 꼭 끓여야 하겠네. 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내가 끓였지만 참 맛있다.” 

남편도 고개를 끄덕이며   


 영원할 줄 알았던 산후 부종은 출산 후 일 년이 되기 전에 모두 회복되었고 검붉었던 아들의 피부와 뾰족했던 머리는 크면 클수록 동그랗고 눈부신 눈꽃처럼 예쁘게 다듬어졌다. 알레르기가 심해서 분유는 못 먹는 아이를 위해 눈물로 미역국을 먹고 모유를 뽑았던 그날들이 모여 이룬 우리의 모습이었다. 


 나는 한 치 앞날을 알지 못한다는 한계로 걱정을 끼고 산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쓸데없는 고민이었다고 안도한다. 한계가 양산한 고민임을 알고 있음에도 마음은 늘 미래로 내달리고 다행과 불행이란 극단의 시나리오 속에서 흩날리는 불안의 비를 맞는다. 나는 애석하게도 그런 어리석은 사람. 그 부질없는 비를 맞고 서서 아들을 다그치고 혼내며 십이 년을 키웠다.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토록 편협한 마음 안에서 옹졸한 사랑으로 키웠음에도 매년 아들은 내게 낳아준 감사를 표한다. 삶이 즐겁다고, 때로 힘든 일(주로 공부)이 있어도 그 마저도 자신을 위하는 일인 걸 안다고, 그래서 태어난 게 좋다는 아들. 내년에도 후년에도 평생토록 받고 싶은 인사. 욕심인 줄 알지만 나는 또 꿈을 꾸며 우리의 내년을 바라본다. 


 미역국 한 술에 십 이년 전 엄마가 된 나를 소환한다. 한 술 들고 편히 쉬라고. 그동안 네 청춘과 바꾼 작은 생명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람으로 자라고 있다고 축하해 주고 싶다. 

남서영. 엄마 된 걸 정말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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