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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Oct 30. 2024

샐러드

불혹이지만 여전히 성수기를 살고 있어.

손과 발 끝으로 전류가 흐르는 감각 때문에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았다. 친구들이 빨리 병원을 가보라고 했지만 물리치료나 도수치료는 일회성에 그쳤다. 고민 끝에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몸에 짝 달라붙는 레깅스와 쫄쫄이 상의를 입은 꼴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앞에서 눈바디도 재고 사진도 찍는다. 틀어진 뼈는 물론 미세하게 떨리는 근육까지 모두 볼 수 있어야 부상 없이 운동할 수 있기 때문에 입는 옷. 물론 앉았을 때 삐죽 튀어나오는 미운 살은 여전히 눈뜨고 보기 힘들지만 근육이 되어라 주문을 외우며 오늘도 거울 앞에 나를 마주한다.


힘든 오십 분을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꼭 샐러드를 먹는다.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을 때도 있지만 대게는 동네 유명 샐러드 집에서 사 먹는다. 푸짐한 샐러드 채소들 위에는 잘 불려 지은 현미밥 한 줌과 블랙 올리브, 바싹 구운 양파, 김가루, 양파 절임, 옥수수 등이 탄수화물 대체식으로 올라가 있다. 육류보다 어류를 좋아하는 나는 연어 샐러드를 즐겨 먹는다.

운동 후 연어 샐러드

운동 후에는 아무거나 먹을 수 없다. 얼마나 공들여 키운 근육인데. 오십 분 동안 힘들게 늘리고 줄여 놓은 근육을 탄수화물로 망치고 싶지 않다. 단백질은 운동으로 손상된 근막을 회복시켜 주고 근육 형성에 탁월한 영양소. 때문에 필라테스를 한 날은 꼭 고단백 샐러드를 주문한다. 혼자 컴컴한 식탁에서 라면 국물 조미료로 나를 위로하던 점심시간은 그렇게 나를 돌보는 시간이 된다.


“아니,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데 그렇게 비싼 운동을 해야 하나? 요즘은 유튜브 운동도 많고 계단 오르내리면 되지.”

돈도 안 버는 주부가 비싼 운동을 하고 샐러드를 사 먹느냐, 고깝게 생각하는 동네 지인들도 있다. 한때 그들 생각에 동요한 나는 남편이 힘들게 벌어 온 돈, 펑펑 쓰기나 하는 잉여인임을 자처했다. 그러나 '집구석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돈만 쓰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에서 울분이 활활 타올랐다.


“여보, 여보는 놀고 있지 않아. 여보가 애들 잘 돌보고 살림 잘 살아서 나도 회사 일 열심히 할 수 있는 거야. 특히 학원 안 돌리고 집에서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애들 키우는 거, 나는 못하는 일이야. 밥 차리고 빨래하고 애 키우며 여보 인생 희생하려고 결혼한 거 아니잖아. 나는 여보가 결혼해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래야 나도 행복하지. 여보가 외출하고 집에 없을 때면 늘 여보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우리 집을 잘 운영하고 있는 여보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있어.”

다정한 응원 덕에 외풍에 스러지지 않고 살고 있는 나. 지인의 지탄이 이따금 마음에 휘몰아치며 잉여인이라는 분이 차오를 때면 남편은 곱살스럽게 나를 응원해 준다.


‘그래, 나는 우리 집을 운영하는 경영인이야.’

졸지에 경영인으로 둔갑한 신분을 살고 있는 나는 떳떳하게 필라테스를 다녔다. 운동 초기엔 민망함과 수치심 사이에서 갈등하며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 바랐다. 속근육이 하나도 없는 사람 다리는 바람 앞 등불보다 더 위태롭게 흔들렸다. 다리만큼 흔들리는 마음은 온갖 감정으로 뒤엉킨다.

‘못났다, 후들후들. 하지 말까?’

운동 시작 6개월 째

거울 속 내 눈을 마주칠 때마다 얼굴은 못 본 눈 사고 싶은 표정이었다. 레깅스 허리 밴드 위로 튀어나온 옆구리 살은 튜브 같았다. 동작하랴 튜브 집어넣으랴 내 손은 파리처럼 바쁘다. 곁눈질로 본 세상엔 미운 살 하나 없이 예쁜 몸으로 아름답게 동작하는 사람들만 있는 듯한데. 바보 같아서 눈물이 날 정도. 그래도 꺾이기 말자고, 가늘고 길게 해 보자고 나와한 약속을 새기며 버텼다.

 

어느 날은 운동 중에 다리가 심하게 떨려 넘어졌다. 운동을 멈추고 친구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가야 할 만큼 그날 내 컨디션이 나빴다. 위기처럼 느껴지던 그 사건. 그럼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사람 몸이야 다 다른 것이고 내 체력도 날마다 다를 수 있다고 나를 달랬다.


우여곡절의 여섯 달이 지나자 난이도 있는 동작을 소화하게 되었다. 선생님의 칭찬에 마치 국가대표 체조 선수가 된 느낌이었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말을 눈으로 확인하자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곁눈질로 훔쳐보던 세상을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 모두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와 삐쳐 나온 살을 지켜보며 자신을 견디고 있었다.


필라테스를 하면 동작에 집중하면 생각이 사라진다. 잡생각이 끼어드는 순간 동작이 무너졌으니까. 하얗게 비운 머리로 온전히 내 몸에 집중하고 나면 몸과 마음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렇게 한 해를 보내자 몸의 변화가 보였다. 타조알을 품고 있던 종아리가 매끈해졌고, 처진 엉덩이는 오리 뒤 태를 닮아갔다. 복부 양 옆으로 복사근이 생겼고 날 때부터 둥글게 말려 있는 줄 알았던 어깨는 자를 댄 듯 펴졌다.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의외의 지점에서 전환점을 맞이한다. 나를 가르치던 필라테스 선생님은 매우 사연 많았다. 9개월 동안 교통사고만 세 번.

'어제저녁 교통사고가 났는데 오늘 오전에 사고 처리를 해야 해서 수업을 못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세 번째 사고 소식을 전하는 문자 메시지에 화가 뭉근히 끓었다. 수업 시작 직전에 시간을 바꿔 달라는 요청도 여러 번. 더는 내 일상을 선생님의 사정에 맞출 수 없다. 나는 손해를 감수하고 결국 필라테스를 떠났다.


운동을 그만두자 근근이 올라온 근육은 빛의 속도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다시 팔, 다리가 저리기 시작했고 어긋난 골반 때문에 바닥에 앉으면 일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귀한 생명을 얻기 위해 내 몸을 두 번이나 뒤집어엎으며 다 틀어진 골격이 나를 통증과 불면으로 내몰았다.


나 혼자 낳은 아이가 아닌데. 자본을 만들어 낼 능력이 없어서 돈 쓸 자격이 없다는 지인들의 경제 논리는 엄마라는 존재를 시궁창에 버리는 말이었다. 남편과 아내가 사랑으로 소환한 생명에 대한 책임은 함께 져야 한다. 육아뿐 아니라 출산으로 틀어져 버린 아내의 안녕까지. 한 달에 십사만 원. 나는 그 돈을 건강을 위해 쓰기로 결정했다.

 

다시 시작한 필라테스는 모든 조건이 완벽하다. 선생님은 시간을 칼같이 지켰고, 섬세하게 교정해 주셨다. 나는 오늘도 거울 속 볼품없는 내게 집중하며 선생님의 지시에 맞춰 동작을 완성한다. 운동은 물리적인 근육을 키워줄 뿐만 아니라 미숙한 나를 격려하게 만드는 정신적인 근력도 함께 키워준다.


목표가 생겼다. 이십 대 때도 가져 보지 못했던 예쁜 라인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목표. 초라한 나를 딱 일 년만 견디면 된다. 그러는 동안 해가 바뀌고 한 살 먹으며 나는 또 청춘과 멀어지겠지만 지천명의 나이가 되기 전까지 긴 머리에 짧은 치마를 입고 불혹을 누리고 싶다.

 

오늘 내 점심.

후들거리는 다리를 질질 끌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앱을 켜서 샐러드를 주문한다.

“월급 빼고 다 올랐네.”

구시렁거리며 아보카도 두부 샐러드를 주문한다. 연어 샐러드는 너무 비싸서 당분간 못 사 먹을 듯. 그래도 꿈이 있고 사랑이 있어 내 인생은 지금도 여전히 성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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