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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Jul 05. 2024

2천만 원짜리 희망

<25주차 임상 기록>

[前]


  대학 은사님을 뵀다. 스승이라는 속뜻을 진하게 담아 ‘선생님’으로 부른다. 스물몇 살에 사제의 연이 되었다. 그 세월이 벌써 그때 내 나이만큼이다. 삶의 위태로움이 또 슬쩍 고개를 들 때 찾아갈 수 있는 스승이 있다는 건 신이 내게 허락한 몇 없는 축복 가운데 큰 것이다. 박사 진학 상담이 구실이었지만 선생님의 언어가 품은 온기 자체를 갈구했는지 모른다.


-어디로 갈래?

-선생님, 저 오늘은 술 말고 뜨끈한 해장국 한 그릇 하고 조용한 찻집에서 선생님 말씀 듣고 싶어요.

-그래, 저쯤에 있을 거다, 가자!


  시뻘건 양선지 해장국이 끌차에 실려 나왔다. 나는 뚝배기의 삼분지 일쯤을 남겼다. 카페로 이동했다. 선생님께 궁리 중인 몇 가지 선택지를 들려드렸다. “그래, 이 전공은 제외키로 하고, 저 분야는 마침 아는 교수가 있고, 선생님이 지도하는 학생 중에는 이런 사례도 있는데..” 마주 보고 앉았음에도 선생님의 영혼이 내 으로 넘어와서 나란히 앉아 골몰하고 있음을 느꼈다.


  자연스럽게 나의 현재 사정으로 말이 흐른다.


-선생님, 저 실은 회사에서 상황이 좀 안 좋아서요.

-그래, 너 얼굴만 딱 봐도 뭔가 있을 것 같더라.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자꾸 저를 막다른 곳으로 내모는 것 같아요.


  차마 떠올리고 싶지 않은 치욕적인 순간도 말씀드렸다. 자아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덧붙였다. “Hoon아, 자아? 그거 네 거 아니다! 자식 둔 아빠는 그냥 아무것도 없이 일하는 거야, 그래야 되는 거란다!” 선생님의 언어가 내 가슴팍을 둔중하게 충격했다. 이런저런 얘기로 굽이돌다 진학과 관련해 선생님은 이렇게 맺으셨다.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는 데 현실적인 장애가 많다, 그러나 보장된 결과란 없는 것이다, 외려 어디선가 그런 것을 약속한다면 그걸 더 경계해야 한다, 공부하기로 한 것은 백 번 잘한 결정이다, 라고.


  선생님께 부복하듯 인사하고 헤어졌다. 전철을 갈아타고 내려 집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바지춤이 부르르 떤다.


「Hoon아 집에 다 갔는지 모르겠구나.

멀리서 찾아왔는데 제대로 된 위로도 못해주고 보낸 듯해서 안타깝구나.

얼마나 고민이 되었으면 분당까지 왔을까 하는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었으나

오늘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옳을 듯했다.

40대 후반, 가장으로서의 무게와 사회적 위상 등이 늘 고민이 되는 시기리라.

그래도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 고민하는 Hoon이의 모습은 나쁘지 않았다.

고민도 많고 자존심 상하는 일도 많겠지만, 이제부터라고 생각하고

잘 계획하고 실천하길 바란다.

세상의 중심에 Hoon이가 있다는 생각 잊지 말고 잘해나가야 하리라.

돌아보면 세상이 언제는 우리에게 친절했느냐?

너에게 친절하게 만드는 것이 어쩌면 사는 일이 아닐까 한다.

지금은 마음이 힘들고 고민되겠지만 네가 꿈꾸고 계획하는 만큼

그 고민은 덜어지리라 믿는다. 기운 내라, Hoon!」


  걷다 말고 멈추어서 선생님께 답장을 보냈다.


「집으로 가는 어둑한 골목길에 멈추고 서서 답신드립니다, 선생님.

말씀과 마음 감사합니다.

길거리를, 대중교통 안을, 먹을 것 마실 것 파는 공간을 채운 만인의 평안이

부러운 요즘이었습니다.

꿈과 계획, 실행이 타인들처럼 정교하고 설득력 있지 못해도 나아가 보겠습니다.

선생님만큼은 제게 늘 친절하셔서 그것만으로 기운 납니다.

단단한 팔뚝이 못 되고 여리고 아픈 손가락인 제자여서 송구합니다.

그럼에도 사랑합니다, 선생님.」




[後]


  다음날 저녁 아내와 마주 앉아 부부지간에 진지한 대화 시간을 가졌다. 아내는 엊저녁 남편이 오랜 스승과 만났음을 알고 있다. 그전에 박사 진학도 원하고 있음을 아내에게 은근히 내비쳤다. 관건은 무엇이겠는가. 보통의 수준을 사는 가정에서 대부분의 문제는 돈 말고는 없다. 아내는 학비로 또 적잖은 돈을 지출하려는 남편이 끝 간데없이 야속했을 것이다. 대화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신호총을 울렸다.


  아내가 자못 비장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리 형편이야 새삼 말하지 않아도 오빠(아내는 나를 그렇게 부른다.)가 잘 알 거야. 등록금? 학비? 절대로 간단한 지출 아니야. 또 오빠가 말하는 그 학위가 대단한 효용 가치가 있을 거라고 솔직히 난 믿지 않아. 근데 오빠가 지난 연말 회사 인사이동 이후로 힘들어하니까, 저러다 사람 하나 망가질 것 같으니까 내가 힘들게 결정했어. 공부해. 오빠는 희망이 꼭 필요한 사람이니까. 그것마저 없으면 완전히 무너질 테니까 말이야. 학비가 다해서 한 이천 몇 백만 원쯤 될라나? 큰맘 먹고 이천만 원짜리 희망을 오빠에게 사주기로 했어. 대신에 지금 회사에 무조건 붙어 있어. 말도 안 되는 일 하고 있지만 난 훨씬 더 큰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여기면서.”


  눈물이 왈칵 솟으려는 걸 간신히 참고 아내에게 답했다. “부인, 난 내가 회복 탄력성이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어. 피아노 위에 올려두는 메트로놈 있지? 그게 나야. 크고 작은 일에 이렇게 큰 각도로 휘청거리는 한없이 유약한 멘탈리티를 가진 놈에 불과해. 그래, 맞아. 난 한 점 희망마저 없으면 안 되는 녀석이야. 그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지, 아니 그럴 확률이 훨씬 높아. 그래도 그걸 간직하는 동안은 견딜 수 있잖아. 다만 완전히 허황된 희망이 아닐 수 있게 내가 가진 모든 연료를 태울게.”


  이야기는 뜻밖의 지점에 가서 정박했다. 우리 부부의 닮은 점은 둘 다 낙관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때로는 비관의 끝으로 달려가 힘들어한다는 것. 다만 다른 점은 나는 그래서 한 줄기 빛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 그것마저 없으면 암흑 속에서 길을 잃고 그대로 주저앉을 수 있다는 것, 아내는 나보다 정신력이 견고하고 대단히 현실적인 사람이라 그런 것 없이도 어떻게든 더듬어 출구를 찾아낼 사람이라는 것. 닮은 듯 다른 두 사람이 만났으므로 그럼에도 조화롭지 않으냐는 말로 억지로 매조지했다.


  내가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살아서 바라노라면 오직 우리 두 내외가 소박하고 행복한 노년의 일상을 누리는 것, 그거 하나라고 말하면서 안방 불을 끄고 거실로 나왔다. 내일 기말시험 마지막 날을 앞둔 딸아이가 공부하는 방 불빛이 문틈으로 뾰족하게 눕는다. 이천만 원짜리 희망의 결과 값이 어떨지 시간의 파도에 올라타 지켜볼 셈이다. <H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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