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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Jul 12. 2024

알기만 아는 이의 죽음

<26주차 임상 기록>

  나는 그를 알고 그는 아마 나를 잘 모를 것이다. 친분은 없고 내 쪽에서 그가 누구인지를 일방통행으로 알 뿐이다. 가만 보면 그런 식의 지인(知人)이 적잖다. 뭔가 밑지는 장사 같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그들보다 눈썰미가 좋고 인지 감각이 예민한 것을. 아무튼 그런 이가 또 하나 있다.


  그는 나보다 두어 살 위 남성이다. 같은 대학 출신이고 학번도 그만큼 빠를 것이다. 나와는 전공이 다르다. 같은 그룹 안에 있는 다른 계열사 직원이다. 재학 시절, 나는 그쪽 전공 동기 선후배들과 친하게 어울렸다. 그들이 캠퍼스 안에서 그와 왕래하는 걸 몇 차례 목격했다. 나의 졸업에 앞서 그가 ‘운 좋게’ 언론사에 입사한 것을 알게 됐다. 역시나 예민한 인지 감각으로.


  ‘운이 좋았다’는 수식의 근거는 이랬다. 주변인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본격적으로, 이른바 언론고시 공부를 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과정이 필요 없을 정도로 평소 실력이 출중한 사람이었다면 그건 덧붙일 말이 없다. 아니, 운도 실력이라는 말까지 있으므로 가진 게 많은 사람이었다고 논평하자. 뿐만 아니라 언뜻 보아도 시쳇말로 호감 가는 용모에다 호방한 성품이 엿보였다. 어려운 취업 관문을 너끈히 뚫어낼 듯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출근해서 회사 전산망에 접속했다. 부모상, 빙부모상, 조부모상 정도가 흔하고 본인상은 매우 드물다. 어쩌다 보아도 오래전에 퇴사한 인물이지 재직 중의 현역은 사건 사고와 다름 아니다. 본인상 게시 글 앞에 내가 밑지는 지인 관계인 그의 이름이 선행한다. 엥? 설마, 하고 클릭하니 잘못 본 것이 아니다. 파티션 너머에 앉은 팀 동료에게 경조사 게시판 보셨느냐 물었다. 동료는 또 고인이 된 그와 직군만 다른 입사 동기다. 동료는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료 휴대전화기가 갑자기 분주하다. 사무실 출입문을 들락거리던 동료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입수한 정보를 공유해 주었다. 망자는 지난해 가족들과 해외 연수를 떠났다. 잘은 모르지만 그쪽 직업 세계에서 그것이 누구나 갈망하는 황금기이자 보상이라고 들었다. 회사 내외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외국 대학이나 연구기관으로 가서 일 년여 기간 체류하고 온다. 정말로 공부나 연구를 열심히 하는지, 적절한 휴식을 취하는지, 마음껏 놀고먹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으나 직업적 생애에서 꿀맛 같은 홀리데이일 거라는 짐작은 가능하다. 한 이십 년쯤 몸 바쳐 일하던 사람이 얻은 귀중한 시간이니 그야말로 삶의 정점 아니겠는가. 함께 간 가족들과 이국의 정취 속에 보내는 일상은 얼마나 이채로울지, 행복하다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구를 것도 같다.


  해외 연수 중인 그가 몸이 이상함을 느꼈단다. 이국의 병원에서 청천벽력 같은 난치병 진단을 받았단다. 현지에서 병을 고치기가 쉽지 않았다. 가족을 남겨 놓고 급거 귀국해서 치료를 이어갔다. 그런 그가 얼마 전에 갑자기 외국에 남은 가족이 보고 싶다며 다시 비행기에 올랐단다. 가족과 해후한 직후 몸 상태가 급전직하로 나빠졌다. 이역만리 그곳에서 유명을 달리했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숨 쉬지 못했다. 안타깝다는 말로는 부족해서 어떤 이의 삶에서 희비가 이런 식으로 교차해도 되는 것인지 절대자에게 따져 묻고 싶은 기분이다.


  모든 죽음은 의미를 남긴다. 그의 죽음이 시사하는 것은 ‘생의 덧없음’ 같은 흔한 결론일까.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사람 인생이라는 빤한 명제인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인생사 새옹지마여서 뜨면 지고, 꺼지면 솟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는 연역적 진리의 한 사례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많은 이의 삶과 죽음이 그런 우주적 원리 위에서 작동한다는 귀납이다.


  타인의 불행에 반사한 자신의 행복만큼 비겁하고 치사한 것이 없다고 느껴왔다. 나는 저 사람, 혹은 그 집안사람들보다는 나은 사정입네, 역한 비교의 결과로 안도한 것이 생을 통틀어 몇 번인지 헤아림조차 어렵다. 솔직하게 자기혐오의 감정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본능의 영역에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열반이나 성불,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사바세계의 중생이 무릇 그런 것이니까. 남의 떡과 나의 고통이 가장 큰 가운데 남이 가진 형편과 어쩔 수 없이 견주어 자신을 인지하는 게 인간이니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속뜻에 그런 것도 있었는지 완전히 부정할 순 없으니까 말이다.


  다만 어떤 죽음을 응시하며 나는 거푸 반성하는 삶을 살겠다. 비교 견적에 의한 안도와 안녕이 아니라 진심으로 뉘우치고 되새기려고 한다. 오늘 나의 삶이 비록 생의 화려한 꼭짓점이 아니더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잠들겠다. 아프지 않고 건강한 것만으로 행복의 절대적 조건이 갖추어진 것이며 서로가 안타까운 몇 없는 혈육일지언정 하루 끝 돌아갈 그곳 집이라는 곳에서 재회하여 소박한 끼니를 나눌 수 있음에 절대자에게 고마운 마음을 품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우주가 멈추는 듯 깊은 묵념으로 빈다. <H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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