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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Jul 19. 2024

As time goes by

<27주차 임상 기록>

  옮겨온 부서 사람들과 뜻밖에 점심 회식이 있었다. 부문의 장이 오후 반차 휴가라도 간 듯하다. 팀장 이하 사원들에겐 이른바 ‘어린이날’이다. 더욱이 금요일. 여유롭고 한갓지지 않은 것이 더 수상한 회사 조직일 터. 그런 전차로 부서원 일명 열외 없는 점심 회식이 되었다.


  보다시피 알다시피 나는 생애 첫 자발적 금주 중이다. 노랗고 맑은 술잔이 테이블 가운데에서 우뚝 솟으며 모인다. 내 팔뚝에서 뻗은 유리잔만 검붉은 간장 색깔이다. 사정을 아는 동료가 은근슬쩍 탄산음료를 주문 가운데 섞어주었다. 까닭을 모르는 나머지 부서원들이 온통 성화다. Hoon, 왜 술 안 마셔?! 여차저차 이차그차 해서 당분간 그렇게 됐습니다. 호호.


  ‘왕년에 한 따까리’ 하던 올드보이들이 모인 팀이다. 팀원 중엔 내가 막내다. 팀장은 이쪽 업무를 오래 해왔고 나보다 한두 살 어리다. 최고참으로는 내년 정년을 앞둔 대선배님이 있다. 혹자는 말했다. 일이 힘든 건 어떻게든 견딘대도 인간관계 어려운 건 당해낼 재간 없다고. 천만다행으로 그쪽으로는 당장 걱정이 없다. 형님들로부터 적당한 지지와 응원까지 받는 나다.


  왕고참 선배님 얼굴이 불콰해지셨다. 이보다 더 기분 좋아 보일 수 없는 표정이다. 사무실에선 내둥 샤이(shy)하시더니 어느새 알코올성 다변가가 되셨다. “내가 여러분들 나이였던가. 아니면 조금 더 젊었을 때였나. 회사에서 일하는 거 영 이건 아닌 거 같아서 확 때려치워야지 마음먹고 술을 왕창 마시고 집에 들어갔어. 지금보다 훨씬 형편이 안 좋을 때라 손바닥만 한 방 두 개에 부엌 하나 딸린 집이었지. 내가 애가 셋이잖아. 쬐끄만 한 방에 코딱지 같은 것들 셋이 딱 붙어서 누워 자고 있는 걸 보는데 눈물이 왈칵 솟더라고. 내가 이것들 두고 회사를 어떻게 그만두나,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지.”


  전에 없던 기백이 넘치신다. “자 자, 우리 기분 좋게 한 잔 부딪칩시다. 새로 오신 분들은 안 하던 일들이라 많이 생소하실 텐데 모쪼록 잘 적응해 주시리라 믿고. 인생 뭐 있습니까. 시간은 가고 월급은 들어오고 애들은 크고. 그게 인생이야, 딴 거 읎지 뭐!”


  사실 취기도 없는 나로서는 순수 재미로만 치면 끌리지 않는 자리였다. 한데 대선배의 말씀은 큰 울림으로 남았다. ‘시간은 가고, 월급은 들어오고, 애들은 자란다.’ 여러 아포리즘을 새삼 가슴에 새기며 지내고 있지만 그 가운데 으뜸이 됐다.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 새롭게 고찰하는 요즈음이다. 하고 싶은 일을 재미있게 하면서 돈 버는 이가 세상에 얼마나 될까. 그럴 수만 있다면 더없이 행복한 삶이겠으나 많은 이들이 그렇지 못한 여건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살고, 살아내고 있지 않을까 사유한다. 문득 회사 사무실, 열차처럼 줄지은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은 등허리와 뒤통수들이 대견하다. 나도 그 풍경 안에 자연스럽게 섞이리라. 시간은 가고, 월급은 들어오고, 애들은 자란다. 욕심을 더 부려, 내 안에 소년도 늦었지만 한 뼘 자라주길 소원한다. <H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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