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세상에 있지 않은 사람이, 지금 살아서 숨 쉬는 사람의 마음을 일깨워 움직인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법정 스님의 신간 「진짜 나를 찾아라」를 읽었다. 천구백팔십 년대부터 입적 전인 이천 년대까지 스님의 미공개 강연 녹음을 책으로 엮었다.
나는 스님의 책을 대학교 졸업반 시절 처음 읽었다. 설명이 필요 없는 책 제목 「무소유」. 목표로 했던 언론사 입사 전형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가진 것도, 되는 것도 없다고 느끼던 시절이었다. 생의 어느 순간보다 소유의 욕망이 크던 때에 읽게 되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운명적이었달까.
새 책을 이틀 만에 다 읽었다. 좋은 책은 귀한 음식을 먹는 것처럼 한 입 한 입 음미하며 읽고 싶게 마련이다. 한데 세상사 어디 마음먹은 대로만 되려고. 스님의 글은 이 책이 아니더라도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어서 미끄러지듯 읽힌다. 특히나 말로 하셨던 강연의 녹취를 글로 옮긴 것이니 생동감과 현장감마저 진하게 온다. 정신 차리고 보니 단숨에 요리 한 접시 뚝딱 비운 것처럼 계획에 없던 속독이 되고 말았다. 독서 후의 포만감이야 요즘 말로 ‘말뭐’다.
두 가지 메시지가 소화되어 양분이 되었다. 먼저는 ‘선지식’에 관한 것이다. 스님은 여러 저서에서 선지식에 대해 설파하셨다. 선지식(善知識)이란 올바른 가르침을 통해 수행자를 도덕적이고 영적으로 올바른 길로 이끄는 이를 뜻한다. 다만 스님은 그것이 꼭 종교적 지도자나 대단한 위인일 필요가 없고 일상 속에서 깨우치고 뉘우치게 하는 수많은 타인일 수 있다고 강조하신다. “어떤 사람이 좀 얄밉다, 밉상이다, 그런 마음이 들면 오히려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세요. 그 사람은 내 마음을, 내 한 생각을 돌이키게 하는 선지식이니까요. 선지식이라고 하니까 무슨 머리로 쌓는 지식이라 생각하는 분들도 있던데, 여기서 말하는 선지식은 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스승입니다. 선지식이라는 존재가 무슨 야단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깨우침을 주면 그가 바로 선지식입니다.” 말씀을 읽고 머릿속 컴컴한 공간에 퍼뜩 몇 사람 얼굴이 조명을 받는다. 그래, 그대들이 나의 선지식이었구나.
다른 것은 인생에 대한 말씀이다. “우리가 칠십이건 팔십이건 한 생애를 살면서 사는 길이 뻔히 보인다고 생각해 보세요.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 보인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답을 알고 있는 직선 인생은 위험합니다. 위험한 걸 떠나서 재미가 없습니다. 구불구불 돌아도 가고,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가기도 하면서 새로운 꿈도 꾸고 희망도 찾는 것입니다. 그렇게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곡선에는 그런 묘미가 있습니다.” 이즈음의 삶을 관통하는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말씀이었다. 스님은 여러 다른 저술에서 세상과 인생은 고통의 바다, 즉 고해(苦海)라고 은유하셨다. 스님의 말씀처럼 뜻밖에 멀리 돌아가고 생의 어느 때보다 남은 길이 보이지 않는 지금인 것 같아 마음이 더 크게 공명했다.
진짜 나를 찾아가는 중이구나, 받아 들겠다. 만물은 결국 자기 자리를 찾는다. 진리는 언제나 흔하고 단순한 것에 있다고 믿는다. 사필귀정은 단숨에 실현되지 않는다. 세상 모든 것이 반드시 바른 이치로 되돌아간다지만 그것이 어디 한두 나절 만에 되겠는가 말이다. 시간이 걸리겠고 당연하게 반드시 치러야 하는 고통과 고독도 필요하다. 스님의 말씀처럼 둘레에 있는 모든 것이 나의 선지식이라고 여기며 공부하겠다. 나는 더디 걸릴지언정 이윽고 진짜 나를 찾겠다. [H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