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상반기 결산
달력이 넘어간 줄도 몰랐다.
평소처럼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좋아하는 라디오 DJ가 오프닝 멘트로 모두 6월 달력은 넘겼냐고 묻는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빠르게 간다더니, 올해는 빨라도 너무 빠른 것 같은 기분이다. 한 번 쉬어가야 더 멀리 갈 수 있다. 7월의 문턱에서 몇 가지 단어로 올 상반기를 호로록 정리해본다.
2월부터 시작했으니 상반기 첫 시도. 빌라선샤인 소셜클럽 <비건 위크>에 참여하면서 비건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비건 위크는 4명이 한 조가 되어 비건식을 하는 온라인 클럽이다. 일주일에 한 명씩 비건 위크를 진행해서 한 달이면 한 명의 비건인이 만들어지는 원리랄까.
처음엔 건강한 식사를 챙기고자 참여했다. 그런데 생각 외로 요리를 만들고 먹지 못한 식재료를 버리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챙기는 에너지를 많이 얻었다. 또 사람들과 연결되어 비건 그 자체를 고민하는 과정이 캠페인처럼 느껴져서 즐거웠다.
원래 고기는 잘 먹지 않는 편이라 식단에서 빼는 일은 쉬웠지만 내가 사랑하는 계란과 초밥을 빼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초반엔 그냥 야채만 넣고 볶으면 되는 파스타(시래기 파스타, 시금치 파스타, 버섯 파스타…)를 주로 먹었는데, 탄수화물 중독이 되는 것 같아 조금씩 대체식 (비건 버거, 비건 빵, 면 두부 등)을 식단에 넣었다.
이 시기는 회사 업무로 비건 제품 런칭을 앞두고 있어 관련 커머스부터 인플루언서까지 레퍼런스를 많이 찾고 있던 상황이라 몰입도가 높았었다. 비건을 단순히 식단으로 접근했는데 삶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 태도라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달까. 앞으로도 조금씩 비건 렌즈를 내 일상에 적용해보고 싶다.
상반기 발견이라고 하기엔 올해의 발견에 가까운 라디오. 그 시작은 코로나19로 재택근무가 길어지면서였다. 하루 종일 혼자 있는 공간이 너무 적적하고 공허했다. 적당한 백색소음이 필요해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연결해 듣곤 했는데, 우연히 라디오 버튼을 누른 게 시작이었다.
배철수의 음악캠프나 컬투쇼 등 유명한 라디오에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던 내가, 지금은 하루 종일 라디오 삼매경. 버튼 하나로 클래식과 Kpop을 넘나드는 큐레이션 채널이라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었다. 내 바이오 리듬에 맞게 아침에는 잔잔하게 호흡하는 채널을, 점심 먹고 나른해질 때면 시끌벅적한 수다가 있는 채널을, 자기 전엔 영화나 재즈 같은 테마가 있는 채널을.
라디오 사랑이 극에 달했을 때는 <두 시의 데이트 뮤지, 안영미입니다>에 매일 문자를 보내 전화연결 퀴즈도 참여했었다. 나의 엉뚱했던 오답이 큰 웃음을 터뜨려서 선물도 하나 더 받고, 얼마 전엔 두 시의 데이트 광고에 내가 퀴즈 푸는 음성이 나오기도 했다.
주로 오전엔 CBS <강석우의 아름다운 당신에게>, <신지혜의 영화음악>을 듣고, 12시부터 MBC로 넘어가 <정오의 희망곡 김신영입니다>, <두 시의 데이트>, <오후의 발견, 이지혜입니다>를 깔깔대며 내리 듣는다. 저녁이 되면 KBS <사랑하기 좋은 날, 이금희입니다>와 CBS <허윤희의 꿈과 음악사이에>를 틀어놓는 편.
매일 듣다 보니 호불호가 생기는데 이상하게 이리저리 돌리다 꽂혀서 듣다 보면 CBS가 많았다. 그리고 의외로 음악캠프, 푸른 밤, 키스 더 라디오는 음악보다 멘트가 많다고 느껴져 잘 틀어놓지 않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또 하나 재밌는 점은 병원이나 미용실, 동네 슈퍼 등 이전엔 들리지 않았던 라디오가 곳곳에서 들리기 시작했다는 점. 이게 바로 비로소 보이는 것들인가? 유튜브와 넷플릭스처럼 ‘보는’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 듣는 콘텐츠는 팟캐스트나 오디오 클립처럼 정보성 콘텐츠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라디오는 새로운 재미 그 자체였다.
친근하면서 적당히 큐레이션 된 음악, DJ와 나누는 실시간 대화, 여러 연령대를 아우르는 청취자들의 사연까지. 라디오 예찬으로 끝나는 것 같지만 이 정도는 되어야 상반기 발견이지.
모든 게 복합적인 건강진단. 결론부터 말하면 날을 잡고 정형외과, 치과, 산부인과, 소화기 내과 투어를 했고, 내 몸에서 어느 부위가 약한지 알고 조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동 삼만보 여행이 끝나고 발목이 신경 쓰여 정형외과에 갔었다. 발목은 이상 없지만 왼쪽 무릎을 지켜봐야 하며, 당분간 걷는 운동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 지금은 젊으니까 괜찮지만 걷기 대신 수영이나 요가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아니 저 만보클럽 해야 하는데요.
그래서 요가를 시작했는데 또 어느 날, 유독 어깨가 너무 아팠다. 근육통인지 진짜 아픔인지 구분을 할 수 없어서 정형외과에 갔는데 이번엔 목 디스크. 어깨가 아픈 이유는 결국 목이 원인이었고, 목 쓰는 운동을 자제하라고 하셨다. 그럼 저는 무슨 운동을 해야 하나요. 수영장은 지금 열지도 않는데. 흑흑.
아무래도 상반기는 코로나19 영향권 아래서 꼼지락거렸던 것이 대부분이다. 마스크 끼고 잠깐 동네 공원을 걷던 것이 프로젝트가 되어 만보클럽을 만들게 되었다. 만보클럽이 의미 있는 이유는 내가 걷는 것을 좋아한다는 걸 인정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 피드를 넘길 때마다 등장하는 나이키 러닝 앱의 러닝 인증을 보며, 걷는 것은 ‘힙’ 하지 않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처럼 무작정 몇 번 뛰어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걸으며 사색하는 즐거움을 넘어서진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카카로 프로젝트 100을 통해 100일 동안 만보를 인증했다. 달성률은 60% 정도. 더 걸을 수 있었지만 무리하지 말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잠깐 걷기를 중단했다. 한동안 만보를 채워 걷지 않다 보니 무릎이 시큰거리는 건 사라졌는데, 내 의욕도 살짝 사라졌던 것은 비밀. 하반기에는 테마를 가지고 걷고, 걷는 이야기를 좀 더 글로 담아볼 예정이다.
병원에서 요가를 추천하기도 했지만 요가는 내 오랜 버킷리스트였다. 프립에서 진행하는 요가 원데이 클래스에 참여했던 적이 있는데, 정적인 줄만 알았던 요가가 나름 격렬해서 신선한 기억으로 남았었기 때문. 요가원 등록을 계속 망설이다가 등록한지는 이제 한 달 차인데 생각보다 나랑 잘 맞는 것 같다. 무엇보다 매일 조금씩 유연해지는 내 모습이 뿌듯하다. 과연 올해의 운동이 될 것인지.
영월이 왜 좋았냐고 묻는다면 조용하고 사람이 없어서 좋았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류의 낭만에는 관심 없었는데, 이렇게 짧았던 영월이 마음에 남을 줄 몰랐다. 기대했던 에어비앤비 숙소와 사랑스러웠던 강아지들. 스스로 꾸리는 도시에서의 삶이 뭔지 고민했던 시기라 그랬나? 마흔 살 이전에 영월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우선 영월의 사계절을 모두 경험하고, `강원도의 모든 시/군 여행 하기`를 버킷리스트에 담았다. 어디든 자기만의 터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항상 멋진 것 같다.
7월부터 12월까지는 계획한 대로 성실하게 이루는 시간이 되길 바라며 상반기 정리 끝! 다시 걸어갈 준비는 끝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