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이 빠른 편입니다.

by 윤목

잃어버리기도 잊어버리기도 잘하다 보니 망각마저 빠른 편이다. 어디에 무얼 두었는지 뭘 하려다 말았는지 건망증을 넘어서 이 정도면 간혹 치매에 걸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마저 들 때가 있다. 언제부터 이런 상태였는지는 모른다. 그저 어쩌다 보니 이런 망각이 잦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을 뿐이다.


"내 카드 본 사람~!?"


나와 좀 친하다 하는 사람이면 귀에 못이 박힐 정도가 아니라. 이 말을 하지 않는 날을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자주 하는 말이다. 옷 주머니 속, 책상 서랍, 차 안 등 온갖 곳에서 발견되는 카드라는 녀석은 어쩌면 발이 달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눈을 감은 사이면 재빠르게 보이지 않던 발을 꺼내어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어린아이 같은 상상도 해봤다. 그 상상이 혹여나 현실일까 두려워 어떤 날은 실눈을 뜨고 가만히 카드를 지켜보고 있거나 눈을 감은 상태에서 들리지 않을 카드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려 고요 속에 귀 기울여 본 적도 있었다.


회사를 다닐 때도 그랬고 사업을 하고 있을 때도 그랬다. 친분이 있는 이들은 나의 정신머리에 대하여 떠드는 것을 포기했었다. 내가 두리번거릴 때면 늘 그들은 어디선가 나의 카드를 찾아서 손에 쥐어주었고. 나는 그때마다 적반하장으로 그들의 손에서 나오는 카드를 보며 그들에게 의뭉스럽다는 듯 말을 꺼냈다.


"왜 내 카드의 행방을 네가 알고 있는 거지.."


말은 이렇게 해도. 결국은 내가 어디다 둔지 모른다는 점에 대한 회한이 많이 담겨 있는 말이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촬영이 시작하기 앞서 만난 사전 미팅 자리에서 길에 차를 세워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바로 촬영장으로 가야 할 일이 있어 회사 직원에게 장비를 가져오라며 차를 맡겼다. 그렇게 차는 떠났고 나는 위치를 찾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 드려 한 순간. 휴대폰이 보이지 않았다. 멀리 사라져 가는 차를 바라보며 혹여나 차 안에 둔 것은 아닌지 생각하던 중 자동차의 하얀 천장에 이질적인 검은 네모의 물건이 보였다. 그제야 부리나케 뛰었다. "00아!"라고 외치며 한참을 달렸다. 고등학교 이후 단거리 달리기를 그리 열심히 달렸던 적이 있던가. 점점 멀어지는 차의 뒷 꽁무니에 보여준 나의 절실한 팔 돌리기 덕분인지 차는 멈추었다. 다행히 폰이 천장에선 떨어지진 않았지만. 숨이 차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격한 달리기를 해야 했었다.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차 위에 커피를 올려두고 출발한 바람에 앞유리에 커피가 쏟아진 적도 있었고. 차위에 장지갑과 카드지갑을 모두 올려두고 출발하여 땅으로 떨어진 장지갑과 카드지갑에... 결국 장지갑은 찾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또 언젠가는 촬영장에서 현금을 실컷 뽑은 봉투를 어딘가에 두어 70만 원을 잃어버려 며칠간 기분이 좋지 않았던 일도 있었더랬다. 누군가는 이 이야기들이 평생 몇 번 있을까 말까 하겠지만. 나에게는 일 년도 안 되는 사이에 일어났었던 일들이었다.


다행인 것은 이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아직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불행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잊고 잃어버릴 거라는 것이었다.


나의 이런 망각의 습관은 물건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반대로 아주 좋은 습관이라고 생각되는 때가 있다. 그것은 바로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나 나의 일이 아니면 잘 잊어버린다는 것. 그래서 연인관계에서도 친구 관계에서도 이 습관 덕에 누군가와의 앙금이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날이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웃으며 맞이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상대방은 그런 내가 참 신기하다는 듯 이야기하곤 했다. 그와 같은 까닭으로 끝나버린 인연에도 집착하지 않는 편이다. 그냥 나의 한때를 함께 했던 사람. 누군가가 전 연애에 묻는다면 전체적인 감정의 흐름만 기억이 날 뿐. 디테일한 부분들이나 여타 내용들은 잘 기억이 떠오르지 않기 마련이다.


"상담하기에 좋은 성격인 것 같아"


상담을 하다 보면 내담자와의 대화 내용이나 감정이 남아 상당히 힘들어한다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연애 상담을 하고 있는 나에게 그녀도 어느 정도 저 부분에서 힘들어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상담의 다음날이 되면 나는 구태여 되짚어 보지 않는 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나에게 상담을 했던 내담자들은 어쩌면 슬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담할 때엔 감정을 이입해서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상담을 하는 내 마음마저 절절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다음날이 되면 그토록 애잔했고 도와주고 싶어 하던 상담의 내용은 기억의 저 멀리 뒤편으로 숨어버린다. 그렇기에 늘 새로운 내담자들의 상황에 집중할 수 있는 집중력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망각을 하는 버릇을 나는 늘 싫어했다. 평생 도움 하나 되지 못할 그런 나의 삶의 역린 같은 존재라 생각했다. 때로는 남들 다 기억하는 지난 과거의 연애. 누군가와의 언쟁을 나도 기억하고 간직해 보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너무 나만 태평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더는 싫어하지 않기로 했다. 망각의 습관으로 인해 타인들의 고민에 보다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참 다행이다. 망각이 빠른 편이라. 누군가들의 절절하고도 상처들을 버릴 수 있는 쓰레기통 같은 역할을 함에도 그 감정의 잔향들이 나를 괴롭히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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