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사랑하고 싶어 더는 회피하지 않을게요.
'내일이 빨리 오지 않으면 좋겠다'
해야만 했지만 우리는 종종 아니 어쩌면 생각보다 자주 하지 않고 버티는 일들이 많다. 오죽하면 회사 일을 처리하듯 나의 일들도 하나씩 처리해 가는 기계가 되고 싶어 질 만큼. 결국은 그랬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일이 다가오지 않길 버티면 버틴 만큼 힘들었다.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는 핑계를 댈 수 조차 없던 때에는 나는 이런 사람밖에 되지 않는 것인가에 대한 자괴감이 두배 세배가 되어 나를 휩쓸었다.
흔히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동을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이유는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 혹은 마음과 해야만 하는 일 사이의 존재하는 괴리감 때문일 것이다. 그 괴리감이 찾아와 나를 결정하지 못하게 만드는 혼돈의 카오스로 밀어 넣었을 때. 나는 그 상황 자체의 불편함에 한없이 멀어지고 싶어 했다.
삶은 매 순간이 선택이라고는 하지만. 나에게 삶은 매 순간의 갈등이었다. 물론 그 갈등들 때문에 선택을 하게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크게는 가족, 친구, 연인 등 사람 간의 관계에서 갈등들은 자주 나에게 방문해왔다. 그런 갈등들이 늘 반갑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뿌리칠 수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비단 사람 간의 관계에서만 갈등은 오는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도 갈등은 하루에도 수십 번 찾아왔다.
'양치를 지금 할 것인가? 아니면 조금 더 누워있다가 할 것인가?'
누가 보면 대단한 철학에 대한 고찰이라도 하는 듯하게 바라보겠지만. 지극히 일상 속의 작은 갈등이었다. 양치질 하나에 나는 늘 조금 더 누워있다 하겠다는 쪽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선택하기까지의 시간 동안에도 나의 이는 썩어 가고 있었고. 쉬는 동안에도 이는 썩어 마침내 나를 치과로 안내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은 참 이상하다. 뻔히 끝이 보이는 길임에도 꼭 그 길을 가보아야 잘못된 길임을 인지하니 말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이유에 대한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하기 시작했다. 생각의 이유를 이야기하려 들지 않았던 것은 언제부터 였을까. 예전의 나는 줄곧 나의 생각을 남 앞에서 뽐내기를 좋아했고. 타인과 나의 대화에서 내가 발전할 수 있다 믿어 치열한 언쟁의 시간을 사랑했었다. 각자의 다른 가치관과 이야기의 사이에서 스스로가 발전할 수 있는 구석을 찾아낼 수 있다니 얼마나 필요한 시간이란 말인가.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언쟁의 시간들은 나에겐 갈등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본인의 의견이 확고해진다더니.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꼰대가 되어가는 과정일까. 언쟁을 즐기는 시간은 갈등이 되어 남에게 나의 생각을 관철시키려는 시간으로 변질되었고 서로 가치관의 갭만을 확인하는 그 시간들을 나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 불편의 시간을 외면하려 들었다.
늘 모든 것은 처음이 가장 어렵다고 하였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나의 목소리도 오디오북 몇 번의 녹음에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친근감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나에게 갈등에 대한 회피도 그렇게 다가왔다. 갈등에 대한 회피. 갈등으로 인한 말다툼 자체에 피로감을 느끼는 나는 두 가지의 방법으로 그 갈등들을 회피하곤 했다.
첫 번째 방법은 갈등이 일어날 것 같은 시기가 찾아오리라 보이면 그 상황 자체를 회피하는 것이었다. 주로 이 방법은 잠수를 타거나. 폰을 꺼두거나 하는 방법이었다. 우리는 알고 있다. 회피를 하는 이유는 갈등에 대한 책임이 주로 나에게 있음을. 그리고 그 회피는 스스로의 신뢰도를 크게 떨어 뜨린다는 것을. 이 방법은 아마 내가 20대 중후반까지 사용했었던 기억이 있다. 마지막으로 이 방법으로 사용했을 때 나는 부모님께 크게 꾸지람을 들었다. 나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 불거진 갈등이었는데 젊은 날의 나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기 싫어 한 달 정도 가량 연락을 끊어버렸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누군가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에 대한 내용을 한없이 고민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이렇게 답했다.
"그럴 수도 있지"
두 번째 방법이다. 내가 입에 달고 사는 말. 내가 좋은 사람이고 싶을 때에는 나와 다른 남들과의 다른 행동을 부정하지 않겠다는 의미라 이르기도 하고. 남과의 대화를 단절하고 싶을 때, 혹은 의견을 더 이상 나누고 싶지 않을 때 주로 하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나를 잘 아는 이들은 나의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 한마디에 입을 다물게 되었고. 나를 잘 모르는 이는 내가 포용력이 넓은 사람으로 판단하게끔 하는 잣대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포용력의 넓은 사람이 아닌. 나의 의견에 더 이상의 이유는 말하고 싶지 않음의 이유로 많이 사용한다.
갈등을 만들기 싫어 주변의 많은 이들을 정리했다. 특히 친구들. 원래 성격상 먼저 안부를 묻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아서 친구라 부를 영역의 인원이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마저 정리했다. 서로 연락하고 지낼 친구는 열명 안으로. 어쩌면 이 또한 회피라 생각이 들기도 하는 요즘이다.
갈등은 늘 어딘가에서 온다. 그런 갈등을 침묵이나 회피로 맞이한다면 그 결과는 참담하다. 관계가 무너지고 그 관계가 무너지면 결국 스스로는 그 탓을 또 본인에게 돌려 자멸하게 될게 뻔하다. 그게 늘 나의 패턴이었다. 2020년의 하반기.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더 이상 갈등들을 회피하지 않기로 맞서기로 했다. 피로감이라는 단어에 숨지 않기로 했다. 피로감 뒤에 숨어버리던 나는 늘 피로하게 만드는 이유에 대해 스스로를 합리화시켜야 했고. 그렇게 나는 점점 자신의 생각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습관마저 쌓여버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나는 슬프게도 내일도, 모레도 갈등이 생길 것을 알고 있고. 여전히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도 회피하지 않기로 했다. 스스로를 사랑해 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