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리우스 May 25. 2024

0원 디자이너

2023년 10월 말에 대한민국 헌법에서 신분을 보증하는 공무원을 그만두었다.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빵집과 서점을 융합한 나만의 크리에이티브한 가게를 차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실업자가 되어보니 갈길이 막막했다. 그래서 새벽에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하나님 아버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선한 길로 인도해 주세요.'

 

기도를 했는데 예상하지도 않게 전혀 생각하지 않은 일을 하며 6개월을 보냈다. 그게 무슨 일이었는지는 비밀로 해두고 싶다. 그렇게 생활을 했다가 드디어 가정의 달 5월이 되었는데 내 통장에 0원이 찍혔다. 이런 적이 처음이어서 당황스러웠다. 생각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말 돈이 하나도 없었다. 조카와 함께 동전을 모은 돼지 저금통이 있었는데 아침에 노란 돼지 저금통을 내려봤다. 코부분을 보니 분리가 가능할 것 같아서 녀석의 코를 비틀어 분리했다. 동전을 뺄 수 있는 통로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엄지손가락을 밀어 드르륵 소리와 함께 커터칼날을 올렸다. 돼지코에 갔다댔는데 플라스틱이 생각보다 단단했다. 돼지코에 미세한 칼자국만 남긴 채 돼지코를 도로 붙여놓고 저금통을 내려놓았다.  

 

살면서 지인들에게 돈을 꿔본 적이 없었다. 아는 형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할까 몇 번을 고민하다 말았다. 그리고 제일 편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니 대학 후배 두 명이 떠올랐다. 남자애한테 편의점 도시락 쿠폰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녀석은 교회에서 밥을 얻어먹으라며 내 요청을 무시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인 여자애한테 똑같은 부탁을 했는데 그 친구는 고맙게도 GS25 편의점 쿠폰을 무려 3만 원짜리를 보내주었다. 고마웠다. 꼭 갚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보름 정도 돈이 너무나도 없는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돈이 약간이나마 있다.돈이 없어보니까 앞으로 돈을 아껴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돈이 없으니까 부끄럽지만 매사에 신경질이 나는 경험을 했다. 영화 기생충에서 송광호 가족들이 부자들은 구김살이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돈이 다리미가 돼서 부자들 마음을 다려주니까 성품에 구김살이 없다는 이야기다. 어느 정도 공감이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아무 일이나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이력서를 어마어마하게 보냈는데 대부분 서류전형에서 탈락되었다. 아르바이트 신청도 했는데 대부분 탈락이었다. 내가 바로 할 수 있는 일은 택배와 쿠팡물류센터였다. 내가 하겠다고 하면 바로 일을 할 수 있었는데 하고 싶지가 않았다. 길거리에 트럭을 세워두고 무거운 짐들을 나르기가 싫었고 이어폰도 못 끼고 하루종일 물품배송 시스템의 톱니바퀴가 되려니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용기를 내서 디자인 전공을 살려 디자인 프리랜서 일을 시작했다. 현역 디자인 필드를 떠난 지 15년이 지난 나는 다시 그림을 그리고 아이디어를 고민하고 디자인을 한다. 요즘 디자이너들의 작품들을 보면 내 디자인과 표현력이 트렌드를 한참 못 따라가고 있었다. 7개 디자인 프로젝트에 지원했는데 모두 떨어졌다.

 

디자인 프로젝트 계획서를 보면 앞이 막막할 때가 있다. 아이디어가 전혀 생각이 안 날 때면 또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렇게 몇 시간을 고민하다 결과물을 만들어내면 또 내 딴에는 아주 만족스러워한다. 뿌듯한 마음에 제안을 했지만 결과는 떨어졌다. 계속 떨어지고 디자인 작업이 힘들지만 그래도 재밌다. 내가 디자이너이긴 한 것 같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고 나만의 클래스를 만들어가는데 보람이 느껴진다. 디자인이 잘 풀리면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김태우, 클래스 어디 안 갔네! 멋진데!'

'그래! 난 전국에서 1등을 했던 디자이너야!'

 

그리고 언제나 내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린다. 예술가들은 늙어서도 계속 연습을 한다. 왜냐면 실력이 조금씩 계속해서 늘기 때문이다. 열심히 하다 보면 현역 디자이너들과 맞짱을 떠서 이길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한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하하하. 모두 제자리가 있는 것처럼 나도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 같다. 아! 글쓰기와 책 만들기도 해야 한다는 걸 잊지 않으면 좋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