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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끄러짐의 미학

by 태리우스

어렸을 적, 엄마와 여동생과 함께 롤러스케이트장에 자주 가곤 했다. 엄마를 따라 용마산을 등산한 후, 한참을 걸어가면 롤러스케이트장이 나타났다. 그곳은 언제나 디스코텍처럼 신나는 음악과 스케이터들로 가득했다. 우리 발사이즈에 맞는 롤러를 빌려 의자에 앉아 서툴게 신발끈을 묶고, 엉거주춤 일어서 본다. 서서히 균형을 잡으면서 일어나 보면 신발에 달려 있는 둥근 플라스틱 바퀴 때문에 키가 훌쩍 커져 있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오른발을 내밀면 곧바로 두 팔을 공중으로 휘저으며 꽈당! 몇 번을 그렇게 넘어지며 온몸으로 통증을 느끼다 보면 진심을 다해 행동 하나에 신중해진다.


'그래, 먼저! 무릎을 굽히고 몸의 무게 중심을 낮춰서 최대한 안정감을 갖자! 그리고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딛는 거야!'


10분 동안 이동거리는 3m도 되지 않는다. 주위에 있는 선반, 자판기, 손잡이들을 잡고 어렵게 트랙 입구에 도착한다. 쌩쌩 달리는 스케이터들을 보고 침을 꿀꺽 삼킨다. 심호흡 한 번 하고, 좌우를 살펴보고, 후~우! 트랙 위를 질주하는 레이싱카들 틈에 초보 운전자가 깜빡이도 없이 무작정 끼어든다. On the Track이 되긴 했다. 다리의 각도와 힘을 조절하며 지면을 밟고 이동하는 이족보행 동물의 발바닥에 갑자기 바퀴 4개가 달렸으니 뇌와 함께 온몸이 얼마나 놀랐으랴? 어쩌면 우리의 뇌와 신경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심각한 사태로 파악했을지도 모른다. 온몸의 교감신경, 부교감신경, 자율신경계와 신경세포들이 초능력을 발휘하듯 적응하여 반응한다. 그들의 노력으로 트랙을 돌 때마다 자세가 교정되고, 점차 속도가 붙었지만 여전히 꽈당! 몸속에서 일어나는 위급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나고 재밌었다.


롤러장에서 가장 신기했던 것은 롤러스케이트를 뒤로 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DNA의 이중 나선 구조처럼 두 다리 모양을 신기하게 S자로 겹쳐서 그리며 미끄러지듯 뒤로 달렸다. 모두가 전진하는 군중 속에서 후진으로 스케이팅을 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김연아가 트리플 악셀을 하기 전, 우아하게 곡선을 그리며 몸을 뒤로 하는 그 고요한 순간을 연상케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들의 스케이팅 포즈는 내 마음속에 사진처럼 남아 있다.


시간이 흘러, 국민학생 때의 롤러장은 이제 30년 넘게 가지 않은 추억이 되었다. 아직도 롤러스케이트장이 남아 있을까 궁금해져 찾아보니, 서울에 몇 군데 운영 중이다. 예전처럼 어두운 우주 같은 공간에 번쩍이는 네온 불빛의 분위기와 콘셉트는 비슷하다. 어릴 적의 롤러장은 굉장히 크게 느껴졌는데 요즘의 롤러장은 그 규모가 작게 보였다. 사진을 보니 이용객들도 적고 가족 단위, 연인 단위로 여유롭게 즐기는 분위기 같다. 현대의 롤러장은 훨씬 세련되고 깨끗해진 모습이지만 옛날처럼 청자켓, 가죽바지를 입은 피 끓는 청소년들과 청춘들로 가득 찬 시끌벅적한 롤러장이 그립다.


롤러스케이트는 인라인스케이트가 등장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다. 사람들은 LP와 카세트테이프가 CD 플레이어에, MP3 플레이어에, 그리고 스마트폰에 밀려 사라질 거라고 예언했었다. 하지만 여전히 LP 매니아가 있고 카세트테이프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이처럼 롤러스케이트도 아직도 남아 있어 찾는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롤러만의 확실한 매력이 있는 것 같다. 그 매력이 무엇일까?


사람은 미끄러지는 느낌을 좋아하는 것 같다. 서핑도 파도를 미끄러지듯 타는 거고, 스노보드도 눈밭을 미끄러지듯 내려가고, 롤러도, 스케이트보드도, 자전거도, 심지어 춤도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게 아닌가? 어릴 적엔 미끄럼틀을 타고 어른이 되어서는 야외 수영장에서는 물놀이 미끄럼틀을 탄다. 문제는 멋지게 미끄러지려면 수없이 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뉴스에서 중년의 통통한 아저씨가 피겨스케이팅을 취미로 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스케이팅을 얼음판 위에서 미끄러지듯 펼쳐지는 발레라고 생각한다. 그 아저씨의 스케이팅은 아름답거나 우아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남자가 부러웠다. 빙판을 미끄러지는 느낌은 어떨까? 스케이팅 엣지로 얼음을 찍고 멈출 때 느껴지는 중력은 어떨까? 균형을 잡고 기술을 하나씩 배워갈 때 어떤 마음이 들까? 추운 스케이팅장에서 둥글한 몸으로 어설픈 기술들을 선보이는 그 남자가 행복해 보였다.


나이를 먹으니 스케이트류를 탈 생각이 안 든다. 잘못했다가 어디 부러지거나 멍들고 골병이 들 것 같아서다. 상처가 나거나 아프면 회복력이 예전 같지 않고 탄력도 떨어지고 유연성도 떨어지고 돈도 들고 여러 가지 등등등. 컬러풀한 꽃다발이 어느덧 시들어 손가락 한 번 까딱하면 폭삭하고 이스러질 것처럼 기운이 제로로 느껴질 때가 있는 판에 무슨 운동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이대로 그냥 노쇠해질 텐가? 아니면 놋쇠처럼 스트롱한 중년이 될 것인지 결정해야 할 시점이다. 넘어지고 엉덩방아를 찧어도 리듬을 타며 유려한 라인을 그리는 롤러든, 스케이트든, 보드든, 댄스든, 서핑이든 해야겠다. 나도 한번 멋지게 예술적으로 미끄러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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