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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님이반짝 Apr 24. 2024

나물밥 먹는다 했잖아!


일요일 오후 남편이 내일 퇴근이 늦을 거라고 귀띔을 해주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머다. 내일 저녁 메다. 미리 결정해 둬야 편하다. 고민하지 않는다. 어미는 다 계획이 있는 사람이다. 항상 나보다 일찍 퇴근하는 남편이 저녁준비를 했기에 내일은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다. 아이들에게도 미리 통보를 해두었다.




월요일 저녁 일곱 시 퇴근하자마자 향한 곳은 시장이었다. 다른 곳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찾아간 곳은 단골 나물가게였다. 가지런히 정렬된 형형색색의 나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에 여섯 가지 나물을 6천 원에 샀었다. 오늘도 종류 많은 걸로 고를까 하다 멈칫했다. 나물밥 한번 주는 것도 생야단이다. 내일까지 먹는 건 과하다. 오늘 한 번만 먹고 끝내자 싶었다. 나름 아이들을 위한 배려있는 선택이었다.


어미는 단호했다. 나물만 샀다. 단돈 3천 원에 지갑사정도 챙겨가며 주부 9단이 된 것처럼 뿌듯했다. 행복한 마음은 현관문을 여는 순간 사라졌다.

중2 딸에게 전화가 온다. "집에 들어간다"라고 하는데 끊겼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보자마자 끊은 거다. 거실테이블에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저녁 머 먹냐는 질문에 나물밥이라고 하자 뜸 안 먹는다며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라면 먹는단다. 이건 뭐 앞뒤 분간도 없이 막무가내다. 퇴근 후 빨리 저녁 먹일 생각에 부리나케 갔다 온 보람이 없어졌다. 오늘 저녁은 나물이라고 미리 선포했기에 수월하게 넘어가는가 했다. 알면서 물어본다.


"나물밥 먹는다 했잖아! 그러면 네가 알아서 라면 끓여 먹어라"  "진짜 끓여 먹는다?" 눈치 없이 솔깃하는 첫째의 표정에 화가 솟구쳤다. "앞으로 내한테  달라 하지 마라"  누구도 원하지 않는 나물 사다 주는 게 벼슬인 것처럼  쏘아붙였다. 흐름이 산으로 가는 것 같았지만 이미 내뱉어 버린 말이다.


괜히 한번 더 물어본다. "그래서 먹을 거가? 안 먹을 거가?" 달걀을 몇 개 구울 건지 결정되는 중요한 질문이다. 머라고 구시렁거리는데 들리지도 않는다. "먹는다 안 먹는다 둘 중 하나만 말해" 먹는단다. 어미가 물불 안 가리고 소리를 지르니 첫째가 한풀 꺾였다. 햄 넣어 달란다. "먹고 싶으면 네가 잘라" 원래 넣으려고 했었는데 괜히 성질냈다. 할 줄 모른단다. 초등학생도 밥 할 줄 안다며 해봐야 알지 안 해보고 어떻게 아느냐고 쏘아붙였다.(나한테 하는 소린가) 큰 딸이 냉장고에서 햄을 꺼낸다. 과도를 가지고 햄을 자르려고 한다. 큰 칼을 꺼내 주었다. 어떻게 자느냐길래 먹기 좋게 자르고 했다. 큰 칼 사용이 신경 쓰여 옆에서 보고 있는데 환한 미소 짓는 게 보인다. 그새 햄 자르는 게 재밌나 보다. 나만 화내는 이상한 엄마가 되었다.




'라면 먹자' 이 말 한마디 세상 편한 거 누가 모르나. 이틀 전에할머니 집에서 김밥이랑 라면을 먹었다. 요리는 못할지언정 한 번이라도 나물 챙겨 먹이려는 그 맘도 몰라주고 밑도 끝도 없이 라면타령이나 하니 예열도 하기 전에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치밀었다. 어떻게 매일 먹고 싶은 것만 먹을까. 안 그래도 요리에 예민한데 엄마 노릇할 겨를도 주지 않는 것 같았다.     


속에선 불이 나지만 나물밥은 척척 진행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참기름향은 왜 그리도 고소한 지. 한번 두르고 한번 더 둘렀다. 세 개의 밥그릇에 공정하게 배분했다. 누구 밥그릇에 햄이 더 쏠리기라도 한다면 2차 불구경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첫째는 김을 가져온다. 시어머니가 주신 총각김치와 같이 먹으니 이런 꿀맛이 없다. "괜찮제? 맛있지?" 재차 확인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과정을 다 지켜본 초6둘째가 말문을 열었다. 햄 들어가니 먹을만하다고. 누구도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싹싹 비워냈다. 



저녁밥 한 끼에 따라다니며 떠 먹이는 아이도 없는데 왜 진이 빠지는지. 너네도 나중에 자식 낳아봐라. 나물 가게가 단골이 될 테다. 오늘을 잊지 않고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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