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돌아보고 성장시키는 글쓰기
어느 글짓기 신동(?)의 고백
한 때 나는 - 비록 일가친척과 몇몇 엄마 친구들에게뿐이긴 하지만 - 글짓기 신동으로 불릴 정도로 글짓기에 재주가 있었고 좋아했다. 교내외의 각종 글짓기 대회에 참가했고, 이번에는 어떤 상을 받을지가 궁금할 뿐, 상을 못 받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다만 그 "한 때"가 너무 짧았음이 아쉽다.
초등학생 때 그렇게 글짓기를 좋아하고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중학생이 되자 글쓰기가 너무 힘들었다. 뭐라고 써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 텅 빈 종이를 내는 일이 늘어나면서, 글쓰기가 점점 재미없어지고 글 쓰는 시간이 싫어졌다. 결국 글쓰기를 포기하고 그 이후로는 글짓기 대회는 커녕 작문 수업시간에도 글을 발표하지 않았다. 중,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는 글을 쓸 일이 많지 않았고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안 해도 괜찮았다. 친구들의 시나 수필이 교지에 오른 걸 보며 부럽고 질투가 나기도 했지만, 별거 아니라는 듯 폄하하기도 했다.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은 대학에 가서 더 커졌다. 언론인이 되고 싶어서 신문방송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는데, 정작 글쓰기 수업인 '언론문장연습'이 가장 싫고 어려운 시간이었다. 글을 못 쓰는데 언론인이 될 수는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글을 안 써도 되는 직업을 택했고, 이후 나의 유일한 글쓰기는 고객에게 보내는 이메일이나 보고서 정도였다.
그렇게 6년 정도 직장을 다니다가 미국의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대학원 입학을 위해 토플(TOEFL)이나 GMAT 등 시험 성적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도 에세이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에세이라면 글쓰기인데, 우리말로도 못 쓰는 글을 영어로 어떻게 쓸까, 걱정이 컸다. 대부분 학교가 3~5개 정도의 에세이를 요구한다. 학교별로 주제가 다르지만 '성장환경',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 '자신의 강점, 단점', '지원 이유', '장, 단기 계획' 등이 주요 주제다.
이때 외국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완성도 높은 에세이를 위해 영문학을 전공한 영국인 동료에게 도움을 받기로 했다. 먼저 내가 초고를 작성하면 동료가 문법에 맞는지, 정확한 표현인지 보고 고치는 '첨삭지도'를 해주기로 했다. 어떻게 하면 눈에 띄고 인상적인 글을 쓸까 궁리를 했지만 막막하기만 했다. 나의 성장기는 너무나 평범해서 지루했고, 강점이라고 할 것도 별로 없는 것 같고, 단점은 많은데 다 쓰면 안 될 것 같았다. 지원 이유야 그럴듯하게 꾸밀 수 있겠지만 학교를 마친 후 장, 단기 계획이라니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하루하루 미루다 마감이 코 앞에 닥치자 어떻게든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대충 써도 친구가 고쳐주기로 했으니까 무작정 써보기로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글이 써졌다. 심지어 점점 좋아졌다. 내가 어떻게 성장했고, 어떤 경험을 통해서 지금의 자리에 있는지 나의 과거를 돌아본 후 현재 상태를 점검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그리는 일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게다가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왜 이런 시간을 한 번도 갖지 않았을까 후회가 될 정도였다. 쉬운 문장으로 쓰면 친구가 어려운 문장으로 멋지게 고쳐줄 테니 너무 고민하지 않고 쓸 수 있어서 부담도 크지 않았다.
초고 작성을 마치고 친구에게 보여주자 고칠 게 많지 않다며 그대로 제출해도 될 것 같다고 했다. 말도 안 된다며 어떻게든 어렵고 복잡한 문장과 고급 단어로 고쳐주길 원했지만, 문법적 오류나 잘못 쓴 단어 등 최소한의 수정만 해줬다. 원망이 컸지만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제출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인디애나 주의 한 경영대학원에서 장학금과 함께 입학 허가를 받았다.
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글을 쓰는 과제가 많았다. 책을 읽고 자신의 경험을 곁들인 북리뷰를 써야 했고, 특정 기업의 경영이나 마케팅 전략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정리해서 제출해야 하는 과제도 있었다. 영어로 글을 쓰는 일은 시간이 많이 걸리고 쉽지 않았지만, 예전처럼 두렵거나 힘든 작업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글 쓰는 시간이 재미있었다.
한 번은 마케팅 교수에게 미국 학생들보다도 글을 잘 썼다는 평가를 받았다. 초등학생 때 이후 거의 20년 만에 처음으로 글쓰기로 칭찬을 받은 셈이다. 정말 원어민보다 잘 썼기야 했을까. 다만 복잡하지 않고 쉬운 문장구조로 써서 쉽게 읽히고, 사전을 찾아가며 가장 적절한 단어와 표현을 사용했기에 의도한 대로 정확하게 메시지가 전달되는 글을 써서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쓴 글의 수준은 문장 구조와 표현만 놓고 본다면 미국의 초등 고학년이나 중학생 정도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문장은 쉽지만 로직이 있고 정확한 단어를 사용한 글. 그런데 이게 바로 좋은 글의 정의가 아니었던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잘 읽히고, 잘 전달되는 글", 즉 좋은 글을 영어로 쓰고 있었다. 그래서 글을 쓰면서도 어렵지 않고 재미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우리말로는 그런 글을 못썼던 건지…?
이후로도 오랫동안 영어로는 편하게 글을 쓰면서도 막상 우리말로는 글을 쓰는 건 힘들고 두려워했다. 한글로는 여전히 멋있고 어려운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였던 것 같다.
영어로 글을 쓰기 위해서 네이티브 수준의 영어 실력이 필요한 건 아니다. 오히려 원어민이 아니기 때문에 더 쉽고 전달이 잘 되는 글을 쓸 수도 있다. 다만 본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느냐가 중요하다.
왜 영어로 글을 써야 하는지, 영어로 글 쓰는 게 나에게 어떤 좋은 점이 있었는지는 다음 글에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