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끝내는 영어’, ‘XX로 한 달만 공부하면 OO만큼 말할 수 있다’.
영어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광고 문구이다. 정말 제대로 따라 하면 책 한 권으로 끝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한 달 만에 외국인과 대화가 가능해질 수 있다면 책 한 권이 아니라 열 권도 살 수 있겠다. 하지만 영어를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또한 이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알 수 있다.
한 달 동안 몇 백 개의 단어나 문장을 외우는 건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걸로 영어를 끝내기는커녕 OO만큼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아무리 상황 별 대화를 암기하더라도 실제로 대화를 할 때에 책에 나온 그대로 대화가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수학처럼 공식을 외우고 숫자를 대입해서 풀면 정답이 나오는 학문이 아니다.
시험, 면접, 여행, 등을 앞두고 속성으로 준비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한 달이면 끝낼 수 있다’는 광고에 끌릴 수밖에 없다. 급하고 시간이 없는데 1년, 2년 공부할 시간이 어디 있을까.
사실은 나도 ‘1개월 완성’의 신봉자였다. 특히 시험을 앞두고는 미리 공부하는 것보다 직전에 급히 공부해야 효율이 높다고 믿는 소위 ‘벼락치기’ 전문이었다. 취업을 앞두고 ‘급히’ 토익 점수를 받아야 했던 적이 있었다. 1개월 완성이 필요한 타이밍이었다. 점수가 있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왜 진작에 준비하지 않았을까? 스스로에 대한 원망이 컸다. 짧은 시간에 집중해서 하려다 보니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높은 효율 덕분인지 운이 좋았는지 1개월 공부하고도 좋은 성적을 받았다. 원하는 성적을 받았으니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 영어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취업을 한 곳에서는 토익 점수를 요구했지만 실제로 영어를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영어를 계속할 동기부여가 사라졌다. 1년 반 뒤에 꼭 가고 싶던 광고 회사로 직장을 옮겼다. 그전에 받아 놨던 토익 점수를 아직 사용할 수가 있어서 다시 시험을 볼 필요는 없었다.
새로 옮긴 회사에서는 입사 한 달 뒤에 큰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광고계에 트렌드였던 분야의 전문가를 초대해서 성공 사례, 신기술 등을 듣는 세미나였다. 초대한 전문가 중에는 외국인도 두 명 있었다. 이들의 발표를 통역할 사람이 필요했다. 나의 높은 토익 점수만 보고 상사는 내게 통역할 것을 요청했다. 못 하겠다고 솔직히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면접 때 영어 잘한다고 어찌나 잘난 척을 했던지, 차마 못한다 말할 수가 없었다. 나를 뽑은 이유 중의 하나가 영어를 잘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와서 못하겠다고 하면 자르지야 않겠지만 사기취업(?)이라고 비난받을 것만 같았다. 다행히도 통역을 자원한 직원이 있어서 둘이 나눠서 하게 되었다. 한 명의 통역은 해볼 만한 것 같았다. 미리 발표 내용의 스크립트를 전달받아 번역한 뒤 외우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분은 스크립트 따위는 없다고 했다. 발표 내용을 써서 외우는 게 아니라 큰 내용을 이해한 후에 그저 자신의 말로 풀어낸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건데 그때는 왜 그리도 원망스러웠는지... 발표할 PPT 자료를 받아서 내용을 숙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행사 당일 수백 명의 관객이 참석했다. 발표 차례가 되어 무대에 올랐을 때 그분의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냥 내가 외운 대로 화면에 맞춰 말했다. 농담도 섞어가며 재미있게 발표하는 것 같았다. 그분의 말에 몇몇 사람이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하지만 나의 통역에는 웃음기라고는 없었다. 그저 화면에 있는 내용에 대한 설명뿐이었다. 그나마 외워서 말한 발표는 다행이었다. 질문과 대답 시간에는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엉터리 통역을 눈치챘는지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갔다. 대부분이 발표 내용에 대한 지적 및 확인을 원하는 질문이었다. 두어 개의 질문만 가까스로 대답했다. 나머지는 시간이 없으니 개인적으로 물어보라며 끊어버렸다. 관객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 생생하다.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인생 최대의 망신살이 뻗친 날이었다. 다행히도 상사들은 영어를 잘 못 알아듣는 분들이라 입사 한 달 만에 잘리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날의 일을 계기로 ‘1개월 완성’과는 이별했다. 시간이 없어서 속성반을 찾았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 공부를 했더라면 그런 불상사는 없었을 거다.
지금도 나이가 너무 많은 것을 탓하며 몇 달 만에 속성으로 익히는 방법은 없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대부분은 작년에도 물어봤고, 몇 년 전에도 물어봤던 사람들이다. 없다는 대답에 포기했던 사람들이다. 늦었다고 생각했던 그때부터 시작했더라면 지금 어쩌면 OO만큼은 아닐지라도 OO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한 권으로 또는 한 달 만에 끝내는 영어는 없다.
그림 출처: https://leadbysoul.com/strategy/fools-rush-in-the-power-of-the-slow-thinking-execut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