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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Oct 15. 2021

아들을 남자답게, 딸을 여자답게 안 키우려 했는데...

이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한동안 둘째와 씨름에 빠져 지냈다. 밖에서 집에 돌아오면 5판3승제, 집에서 나갈 때는 단판제, 자기 전에는 3판2승제. 단순히 져주기 씨름은 아니었다. 아이가 최선을 다할 수 있을 때까지 적당히 힘을 준다. 방심하고 있으면 바로 걸어서 넘어뜨린다. 물리력과 물리력이 만나는 탱탱한 텐션을 즐길 수 있도록 긴장을 유지한다.


둘째는 오빠와 권투 놀이도 자주 하고 총싸움 놀이도 즐겼다. 여자아이를 너무 섬머슴아처럼 키우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둘째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핑크의 세계에 빠져 지내던 전형적인 핑크 공주였다. 둘째를 둘러싼 세상은 정말이지 핑크핑크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핑크 집착은 서서히 사라졌다.


성역할 고착화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것이라고, 성역할은 길들여진 것이고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아이를 직접 키워보면 이 말이 맞는지 의심하게 된다. 성역할은 선천적인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는 뚜렷한 경향성의 차이를 보인다.


첫째(남자아이)와 둘째(여자아이)는 대체로 뽀로로까지 취향이 일치했다. 그 뒤부터는 갈라졌다. 첫째는 <토마스와 친구들>을 시작으로 각종 로봇 만화를 전전하며 전형적인 남자아이의 루트를 밟아갔다. 둘째는 <소피아공주>를 시작으로 <마이 리틀 포니 : 이퀘스트리아 걸스> 등 전형적인 여자아이의 루트를 따라갔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질문만큼, 아이들이 이런 만화영화를 원하는 성향이 있어서 보게 된 것인지 아니면 이런 만화영화를 보게 되어서 그런 성향이 생긴 것인지 따지기 힘들 만큼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마치 유치원 다음에는 초등학교에 가고 초등학교에 가면 학년을 밟아가야 하는 것처럼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남아스타일 혹은 여아스타일 콘텐츠를 찾아보았다. 



그중에서도 <겨울왕국>은 단연 ‘넘사벽’이었다. 비틀스의 ‘렛 잇 비(Let it be)’에 익숙한 나의 아날로그 감수성과 〈겨울왕국〉의 ‘렛 잇 고(Let it go)’에 길들여진 둘째의 디지털 감수성은 완벽하게 대비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3D라는 인공적인 디지털 신호를 통해서도 감성의 정점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디지털의 마법이 감성의 체계를 바꿔놓은 것이다. 한동안 딸아이는 수건을 망토처럼 두르곤 했다.


〈겨울왕국〉이 개봉했을 때 극장에서 보고 나오다 화장실에서 남자 고등학생들이 욕하는 걸 들었다. ‘자기 인생에 이렇게 재미없는 영화는 처음’이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그랬다. 여자 아이들은 〈겨울왕국〉을 좋아했지만 남자 아이들은 한국 제작사가 기획한 애니메이션인 〈넛잡〉을 더 선호했다. 물론 최후의 승자는 <겨울왕국>이었지만.


그래도 <겨울왕국>은 그냥 핑크핑크한 다른 만화영화와는 달랐다. 공주의 역할 변화와 관련해서 주목해볼 만한 영화였다. 문제를 자력으로 해결하고 ‘자매애’를 강조하는 것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서는 획기적인 변화다. 이후 <모아나>와 <알라딘>에서도 이런 기조는 유지되었다. 백마 탄 왕자가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되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었다.



아이에게 그림책을 추천할 때 이런 주체적인 공주를 소개하려고 애쓴 적이 있다. 〈내 멋대로 공주〉 〈종이봉지 공주〉 〈긴 머리 공주〉 〈올리비아는 공주가 싫어〉 등 전복적 공주상이 등장하는 그림책을 추천했다.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모티브로 한 〈겨울왕국〉 역시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서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인데 <겨울왕국 2>에서 복습까지 했으니 아이의 세계관 형성에 일정 정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기대된다.


만화영화 중에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두드러지지 않는 중성적인 작품도 있다. <토이스토리>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첫째와 둘째 모두 좋아했던 작품이다. 이런 작품에서는 성별과 상관없이 관계 맺기의 중요성과 책임의식이 두루 강조되어 있다. <토이스토리>의 여성 캐릭터들도 문제 해결의 주체로 활약한다. 이런 설정이 남성성과 여성성을 전형화하지 않는데 기여하리라고 본다.


아이를 위해 인위적으로 성역할 밸런스를 맞춰주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둘째를 키울 때는 의도적으로 이런 밸런스 맞추기를 했는데 돌이켜보니 첫째를 키울 때는 여기에 소홀했던 것 같다.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영화도 두루 보았다면 섬세한 감수성도 기르고 친구 사이의 관계 맺기에 대해서도 신중하게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토마스와 친구들>부터 <레고>시리즈까지 너무 도구와 장비의 세계에 함몰되었던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둘째 머리를 묶어 주고 핀을 꽂아줄 때 아내는 재미 삼아 첫째에게도 해주곤 한다. 그리고 여자아이 이름처럼 바꿔 부르기도 한다. 아이도 재미있어 여기에 호응한다. 지금은 재미 삼아한 행동이 나중에 아이가 큰 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리라고 본다. 섬세함과 꾸미는 능력을 갖게 된다면 더 풍부한 삶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남자아이를 남자답게 여자아이를 여자답게 길러야 한다는, 그런 단순한 시대는 끝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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