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새해 첫 주 일요일이다. H백화점 지하 1층 선물포장 샵의 사장인 조카가 1주일에 한번 이모 찬스를 쓰는 날이다. 내 동생인 그 이모가 출근할 때 시간도 보낼 겸 가끔씩 백화점에 들린다. 지하 1층에는 행사장과 의류매장, 스포츠용품 매장, 식당과 슈퍼 등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행사장의 세일 상품들은 수시로 자리바꿈 하며 지갑을 유혹한다. 행사장을 돌다가 가끔씩은 생각 없이 그 도발에 넘어간다. 그 결과 귀찮음을 무릅쓰고 환불하기에 이르기도 한다. 백화점의 특성상 물건에 하자가 없는 한 반품이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물건과 영수증을 들고 환불 절차를 기다리는 동안은 곤혹스럽다. 아무래도 환불 처리하는 매장 직원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피게 된다.
딱히 잘못한 것은 없다. 그러나 무언가 줬다 뺐는 기분이 들어서 미안한 감이 든다. 그래서 추가 할인이나 사은품 증정이 따라온 경우는 환불 과정이 더 복잡해지기에 아예 이를 포기하기도 한다.
오랜만에 백화점에 들렸더니 포장코너 가까이에 제법 큰 규모의 카페형 서점이 새로 자리 잡았다. 서점 한쪽에는 음료를 사서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중간중간에는 간이 테이블도 마련되어 있어 편하게 앉아서 책을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의자가 모두 치워져 있다. 전국적인 코로나 방역 2.5단계에 준한 조치란다. 매대 앞에 서서 신간 서적들을 뒤적이다 보니 책의 내용과 관련해서 써볼 만한 주제가 몇 개 떠오른다. 좀 더 읽어보니 새삼 내가 브런치에 올리는 글은 애교 수준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든다.
에잇, 브런치 글 쓰는 걸 그만둘까?
지하층을 한 바퀴 돌아오니 1일 사장인 여동생이 카드 봉투를 접고 있다. 샵에 비치된 여러 용품 중 작은 카드 봉투나 현금 봉투는 직접 포장지를 재단하여 만든다. 알맞은 포장지, 철제자, 재단용 연필, 칼, 가위, 고무지우개, 3미리 양면테이프가 기본 재료이자 도구이다.여기에 섬세한 손길과 눈썰미가 가미되어 쌈박한 봉투가 탄생한다.
사실 한동안은 원주인인 조카가 샵에서 이뤄지는 기본적인 일을 익혀보라고 권했다. 오랫동안 하던 일을 잠시 쉴 때였다. 그렇지만 이건 여성들의 영역이 아닌가?
하지만 같은 시내 다른 쇼핑몰의 오래된 포장 샵 사장은 중년 남성이라고 했다. 잘할 필요는 없으니 그냥 재미 삼아 해보라고 했다. 하긴 학생 땐 미술부 활동도 했고 발명에도 관심이 있었다. 이 분야는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손재주가 있어야 하는데 큰 부담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함 해볼까나?
포장코너에서는 간단한 물건 판매 외에 봉투 재단, 접기, 리본 접기, 포장하기, 매듭 만들기, 보자기 접기 등의 작업이 이루어진다. 보통 이 작업들은 전적으로 손에 의지하므로 제품 완성은 숙련도에 의해 좌우된다. 또숙련도는 손재주와 시간과 경험의 믹싱 정도에 따라 그 수준이 달라진다.
지금은 가끔 곁에서 체험하는 정도니 가장 기초작업인 봉투 접기는 도울 수 있다. 그런데 연필선대로 오리고 접고 테이프로 봉하는 작업을 보더니 동생이 작업 패드를 끌어당긴다.
- 내가 할 테니 나중에 테이프만 붙이셔~
--- 음, 그러지.
사실 동생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 저렴한 봉투 하나 제작에도 지극히 섬세하게 공을 들인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 지난번에 신호동을 기다리고 있는데 뒤에 서 있던 젊은 직장 여성 둘이 얘기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어. 남편이 설거지를 도와주는데 영 맘에 안 들어서 두 번 씻게 된다고 하더라.
- 아무래도 보통 남자가 여자처럼 꼼꼼하게 집안일을 하긴 힘들 거야.
--- 그렇지? 근데 만일 아내가 그걸 지적하면 남자는 오히려 하던 일도 포기할지도 모르지.
- 아무래도 여자와 남자의 감각이 다르니까.
--- 사실 누구나 자기의 생활영역에서 철저하게 관리하는 부분, 적당히 관리하는 부분, 미처 손대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그 부족한 부분을 콕 집어서 지적하면 갈등이 생기겠지.
- 그래서 결혼 초기에 상대방의 행동이나 습관으로 자잘한 다툼이 흔하게 벌어지잖아.
--- ㅋㅋ 그래서 남편이 냉장고를 열어보고 지적하거나 아내가 남편 책상 정리에 잔소리하는 것은 금물이라고들해.
- 그거, 애정이 식어야 돼. 그전까지는 끝없이 간섭하고 요구하게 된다니까?
--- 아... 그렇지. 열정이 식으면 귀찮아서도 서로 신경 쓰지 않게 되겠지.
- 한 때의 열정으로 상대방에게 끝없이 간섭한다면 피곤해서 서로 못 살아.
이야기는 일반적인 남녀 간의 감각 차이에서 부부간의 생활 속 갈등으로, 그리고 급기야는 애정 문제로까지 발전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흔히 듣고 보는 노래나 드라마의 주제는 뜨겁고 달콤한 사랑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실 여부에 따라 인생의 행불행이 갈린다. 그런데 살다 보면 그것은 삶의 일부일 뿐임을 알게 된다. 이건 어쩌면 슬픈 일일 수도 있다.
어릴 적에는 어른 부부들이 함께 살면서도 그다지 서로 사랑하지 않은 듯 보여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어른들 중에는 평균 이상으로 이성에 대한 열정이 높은 사람도 있었다. 그런 경우 그 열정은 종종 담장을 넘어 밖으로 향해파문을 일으키곤 했다.
가정의 평화는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러려면 구성원 간 갈등이 없어야 한다. 파트너 사이에 한쪽의 열정이 과하여 의*증으로 발전하거나 그 열정이 제삼자에게로 향한다면 파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역설적이지만,
애정이 식어야 관계가 안정된다~라는 명제가 성립된다.
열정과 애정이 식어서 무미건조해 보이는 수많은 부부관계는 그래서 유지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소용돌이 속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물론 식음의 정도가 얼음 같아서 유리잔같이 부서진다면 그것도 큰 문제이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각자의 생활을 응원하고 배려해야만 독을 깨뜨리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