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에서는 영국에 지내면서 내가 사랑하게 된 문화 3가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첫 번째는 따뜻한 말이다. 영국 사람들은 예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누가 추천해준 영화가 재미없어도 대놓고 "It was terrible! 정말 형편없는 영화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It wasn't the best film but I liked the soundtrack. 최고의 영화라고 하기는 좀 그런데 배경음악은 좋았어."라고 돌려 말하는 식이다. 어렸을 때 가장 중요한 교육은 Please, Thank you 같은 기본 예의범절 교육이다. 따뜻한 말은 아마 여기서 파생된 문화 아닐까 싶다.
한 번은 미셸과 대형 마트에 갔는데 계산대에서 직원분과 날씨부터 마을 행사, 내가 가봐야 할 숨겨진 명소까지 이야기하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그 분이 미셸과 아는 사이였던 게 아니라 그게 정서상 당연했던 것이다. 마트뿐 아니라 동네 가게, 관광지 매표소 등 어디서나 그렇다. 한국에서는 가게나 일터에서 사람냄새 나기 쉽지 않은데 영국은 사람냄새가 물씬 나는 것 같다.
혼자 산책로를 걷다가 만난 할머니는 내게 "You alright, lovely?" 라며 인사를 건네셨다. 성희롱이 아니고서야 처음 보는 사람한테 lovely라는 말을 쓰는 곳도 없을 것이다. 그저 길가다 만난 처음 보는 사이인데 우리는 지나치는 그 짧은 순간 걸음을 늦추며 구름이 어디로 향한다, 오늘 저녁 날씨가 어떨 것 같다며 스몰톡을 나눴다. 영국에서의 이런 순간은 내 작은 삶의 활력소 같은 역할을 했다.
두 번째는 펍퀴즈(Pub Quiz)다. 영국의 펍은 술과 음식을 판매한다는 점에서 주점과 비슷하지만 일요일에 종종 아이를 데리고 식사를 하러 가기도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아는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인사를 나누는 동네 사랑방 같기도 하다. 펍에는 동네 토박이와 함께 가야지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커뮤니티 분위기가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특별한 건 바로 펍퀴즈다. 펍마다 날을 정해 일주일에 한 번 펍퀴즈라는 걸 한다. 단골들이 돌아가면서 또는 가게 주인이 40문제 정도를 내고 참가자들에게 소정의 참가비를 걷는다. 가장 많이 맞힌 사람은 상으로 파인트의 술을 받는다. 여기서 핵심은 문제의 성격이다. 펍퀴즈에서 진지하게 어려운 문제를 내는 사람은 없다. 보통 상식 문제 또는 알 필요가 없어서 모르는 문제, 이렇게 두 유형이 단골이다. 이를 테면 겨울왕국 올라프의 손가락은 양손 합쳐 몇 개인지, 독일이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는 모두 몇 개인지 등의 문제가 있다.
사람들은 옆 테이블에 들릴까 열정적으로 속닥거리며 올라프의 손가락이 몇 개인지에 대해 일행과 토론한다. 친구와 맥주 한 잔 하며 올라프 손가락이 여섯 개인지 여덟 개인지 이야기하다 보면 세상에 이것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는 기분이다(독자분들을 위해 얘기하자면 정답은 여섯 개다) 영국의 펍이 아니고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분위기다.
세 번째는 결혼한 여성의 삶이다. 미셸은 결혼하고 나서도 미셸이라고 불렸다. 새댁이나 존 엄마가 아니었다. 성은 남편 성으로 바뀌었을지언정 미셸 개인의 정체성은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 며느리로 바뀌지 않았다. 그저 추가되었을 뿐이다.
앤드류는 아내가 당연히 가족들을 위해 요리를 해야 한다거나 때에 맞춰 이불 시트를 갈아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미셸이 자기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명절마다 전화를 걸어 남편 기 살려주는 '바람직한 며느리'가 되어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앤드류의 부모님에게는 앤드류가 전화를 걸고 미셸 부모님에게는 미셸이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미셸은 결혼하고 나서도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지켰고 누군가의 아내로만 살아가길 요구받지도 않았다.
내가 생일 선물로 준 82년생 김지영 영문판을 읽고 나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영국의 두 세대 전 이야기 같아."
참고로 그녀는 서른여덟 살이다. 이미 나보다 반 세대 정도 위인 미셸보다도 두 세대 전 이야기라니.
내 한 세대 위인 우리 엄마는 김지영 이야기 곱하기 두 배의 하드코어판 인생을 사셨다. 20평 아파트에서 시부모와 시동생과 신혼생활을 했고 전문직이었던 치위생사 일을 그만둬야 했으며 하루 세끼 식사와 설거지, 청소, 빨래까지 해다바쳐야 했다. 2살, 4살 언니들과 만삭인 나를 데리고도 완벽한 식모가 되어야 했다. 고된 결혼생활 동안 경력도, 친구들과의 연락도 끊겼고 유일하게 남은 사람인 남편은 왜 자기 엄마에게 더 잘하지 못하냐고 그녀를 다그쳤다.
그러나 미셸과 앤드류의 결혼은 완전히 달라보였다.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존중하며, 상대가 행복하면 자기도 행복하다는 생각으로 가꾼 결혼은 진정 쿨해보였다.
워커웨이를 모두에게 추천할 수는 없다. 여행의 목적은 사람마다 다르니까. 다른 사람 집에 사는 것이기에 필연적으로 호스트의 생활에 종속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현지인의 삶을 아주 가까이서 어쩌면 일부가 되어 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런던의 빅벤을 보고 포트넘앤메이슨에서 쇼핑만 했다면 과연 영국을 보고 왔다고, 영국 문화를 삼분의 일이라도 봤다고 할 수 있을까? 본인이 현지인 집에서 그들의 생활에 녹아들어 진짜 문화를 보고 싶다면 워커웨이도 한 번쯤 고려할 가치가 있는 여행 방법이라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