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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다람쥐 Oct 14. 2023

품위 유지비

| 이런 걸 볼펜이라고 갖고 다니냐? |

"얘는 샤프도 비싼 라미 샤프만 써요." 

 처음 들어보는 샤프 이름에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무슨 샤프? 나미? 라미?"라고 되물었던 나는 판촉물이나 기념품으로 굴러들어 온 볼펜만 사용하던 사람이었다. 교탁 바로 앞자리의 학생이 필통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빌려준 볼펜도 당연히 그런 종류였다. 수업을 마무리하는 활동으로 무언가를 적는 시간이 되었을 때, 자기 필통 열기가 귀찮았던 학생이 옆 친구 자리에서 휙 가져간 볼펜도 그 볼펜이었다.

 "야, 너는 이런 걸 볼펜이라고 갖고 다니냐?"

 그 친구 자리에서 가져갔으니 그 친구 볼펜일 거라 생각했던 학생이 말했다. 한 줄 쓰다 말고 필기감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볼펜이길래 이 정도인가'를 눈으로 말하면서 뒤늦게 볼펜을 들어 살펴보며 한 말이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바로 앞에 서있던 내가 대신해주었다.

 "이런 걸 볼펜이라고 갖고 다니는 건 얘가 아니고 난데?"

 학생은 민망한 웃음을 지어 보였고, 옆 친구는 괜히 그 학생은 좋은 필기구만 써서 그렇다는 둥 샤프도 비싼 라미 샤프만 쓴다는 둥 필기구에 대한 그 학생의 기준이 높음을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아마도 그다음 해였을 것이다. 나는 야심 차게 5년 다이어리를 구입하며 좀 괜찮은 볼펜도 함께 사보았다. 홍보 문구나 기관명, 전화번호 등이 적혀있지 않은 매끈한 볼펜을. 마음먹었을 때 종류별로 사보자 싶어서 여러 제품을 사봤더니 다이어리 포함 몇 만 원이 훌쩍 넘는 금액을 결제해야 했다. 결제 금액을 보며 생각했다. 좋은 볼펜에 익숙해지면 계속 이런 볼펜만 찾게 되려나? 그럼 나는 정기적으로 이 정도 금액을 볼펜 구입에 써야 하나? 그 후 일 년이 지난 지금, 이런 나의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필기감 따져가며 볼펜을 구입한 뒤의 나는 부드럽게 써지지 않는 데다 똥범벅이 되는 판촉물 볼펜을 쓰기가 힘든 사람이 되었다. 예전엔 분명 아무렇지도 않게 쓰던 볼펜이었는데 말이다. 반면 손으로 뭔가를 쓸 일은 생각처럼 그렇게 많지는 않아 그때 사둔 볼펜을 아직까지 쓰고 있기에 정기적 볼펜 구입 비용에 대한 염려를 할 정도는 아닌 것으로 판명 났다(그때 워낙 많이 샀기 때문이기도 하다).



| 부랑자 꼴? 저 부르셨어요? |

 한 번 높아진 눈높이는 다시 낮추기 힘들다고들 말한다. 판촉물 볼펜을 쓰다가 팔천 원짜리 볼펜을 쓰게 된 사람도 그걸 느낄 정도이니, 어린 시절부터 왕실의 호화로운 선물을 받는 데 익숙했던 모차르트는 말해 무엇하랴. 모차르트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이유는 수입이 아니라 지출 때문이었다. 그는 먹고 입는 소비 수준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적지 않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헤픈 씀씀이 때문에 빚을 지는 일이 많았다. 그의 편지를 읽다 보면 그가 옷차림에 상당히 신경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례도 지나가고, 더워졌는데 옷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새로 맞추어야 했습니다. 특히 요즈음, 빈 거리를 부랑자 같은 꼴로 돌아다닐 수는 없었습니다.
- 1781년 9월 5일, 모차르트가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쓴 편지 중에서 - 


 이미지 관리를 위해 옷차림에 신경 쓰던 모차르트의 피복비는 일종의 품위 유지비가 아니었을까. 부랑자 꼴로 놀이터 지킴이를 몇 년간 했던 나의 육아휴직 시기 품위 유지비는 0원에 수렴했다. 당시 내가 신경 썼던 건 품위가 아니라 시소 옆에 쪼그려 앉을 때 내려가는 밑위, 개미가 몰려들던 주위, 그늘 없는 놀이터의 더위 등이었을 뿐. 복직 후 다시 월급을 받게 되자 품위 유지비로 불릴 수 있는 항목의 비용은 비교 불가로 올라갔다. 중학생들 앞에 서는 나도 이럴진대, 자기 음악의 잠재적 소비자로 가득한 빈에서 허름한 차림으로 다닐 수는 없었을 터. 그의 소비 수준이 높은 탓도 있지만 나름의 전략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마음에 드는 코트의 구입처를 알기 위해 남작 부인에게 편지까지 쓰는 건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모차르트의 모습이었다.

제 마음을 매우 설레게 하는 저 아름다운 빨강 프록코트 때문에 부탁드리는데, 어디서 구하셨고 값은 얼마입니까? 저에게 정확히 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 1782년 9월 28일, 모차르트가 폰 발트슈테텐 남작 부인에게 쓴 편지 중에서 -

 모차르트가 지금 살고 있다면 각종 명품 브랜드가 참가하는 오트쿠튀르 FW 패션쇼의 첫 번째 줄에 앉아 있을 것만 같다. 



| 지속가능한 품위 유지비 지출? |

 많이 벌어도 많이 쓰면 남는 건 별로 없다. 고소득자라도 품위 유지비 명목의 지출이 크다면 정작 손에 쥐는 금액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소득이 없는 학생들의 경우는 어떨까? 중학생도 나름의 품위 유지비가 든다. 옷, 가방, 운동화 등과 더불어 내가 중학생일 때는 존재하지조차 않았던 스마트폰, 패드, 각종 웨어러블 기기들까지. 스마트폰 비용은 품위 유지비가 아니라 통신비로 넣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학생들 사이에서 스마트폰 기종은 그들의 품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이폰, 에어팟에 그렇게 목숨을 걸 리가 없다.


 이렇게 부모의 소득으로 품위 유지비를 지출하며 학창 시절을 보낸 학생들이 성인이 되어 점점 더 늘어나는 품위 유지비를 감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모 세대가 사회에 진출할 때의 고도성장이 사라진 사회라 이들의 취업은 부모 세대보다 어려워진다. 부모 세대보다 개개인의 교육 수준은 뛰어나지만 좋은 일자리를 구하기는 힘든 상황. 그래서 MZ세대는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로 불린다고 한다. 


 그래서 진로 수업을 위한 활동지를 만들다 보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올 때가 많다. 나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비싼 필기구로 가득 채운 필통, 나는 큰 마음먹어야 타는 택시를 아무렇지 않게 타고 다니는 대범함, 교복 놔두고 기어이 교칙을 어겨가며 사시사철 비싼 사복으로 자랑하는 패션 감각 등을 가진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진로 수업은 어떤 것일까를 고민하다가 자주 방향을 잃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부모 세대보다 경제적으로 발전한 상태의 나라에서 태어나, 풍족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이들은 부모의 도움 없이도 계속해서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진로 교과서에 나오는 아름다운 말들과 신용불량 청년층이 늘고 있다는 뉴스를 오가다 보면 나의 진로 활동지는 점점 더 산으로 간다.


호엔잘츠부르크성에 올라갔다가 들른 마리오네트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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