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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다람쥐 Oct 20. 2023

진로를 주제로 중학생들이 쓴 글을 읽다가

교내 진로 관련 글쓰기 대회가 있었다. 학생들이 제출한 글을 읽으며 아래와 같은 생각을 했다.


1. '우연히'의 힘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우연'의 힘은 강력했다. 우연히 본 영상, 우연히 들은 이야기, 우연히 겪은 일에서 시작된 글이 많았다. 심지어 택시 기사님의 자식 자랑이 심어준 꿈의 씨앗도 있었다.

... 놀러 가던 중 택시 기사 아저씨가 자식 자랑을 하셨습니다. 자기 셋째 아들이 이번에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가 되었다며 아들 졸업식 사진을 보여주셨는데 사진 속 그 사람이 너무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저씨가 아들을 자랑하며 자랑스러워하시는 표정을 봤습니다. 저도 그 아들처럼 부모님이 어디 가서 자랑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친구들과 택시 기사님 자녀들은 자랑거리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도 택시 기사를 해볼까, 그럼 애들이 잘 크려나, 자랑거리가 없으면 택시 면허가 안 나오는 게 아닐까 등등 헛소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으나 차선 변경 능력 부족이라는 치명적인 요인을 서로에게 상기시킴으로써 아무 말 대잔치를 일단락했더랬다.


 학생의 글에 나온 기사님은 본인의 셋째 아들 자랑이 한 중학생의 꿈을 공군 장교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모르시겠지. 무엇에 대한 관심이 꼭 거창한 것에서 시작하는 건 아니다. 졸업식 사진을 보고 시작된 공군사관학교에 대한 학생의 관심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쪽 분야에 관심이 전혀 없는 학생이었다면 기사님이 사진까지 보여줄 정도로 진지하게 그 자랑을 들었을까 싶다. 1절만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자랑이 경청하는 승객을 만나 사진 보여주기까지 이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잘 들어주는 승객을 만나 신나게 자랑할 수 있었던 기사님에게도, 이렇게 글감으로 쓸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은 학생에게도 좋은 우연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2. 부모의 영향

 부모는 아이들의 롤모델이 되기도 하고, 자신의 관심사를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노출시키는 역할도 했다. 무엇에 대한 흥미는 그것을 접하는 빈도에도 영향을 받는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따라 야구장을 다녀봤던 아이와 한 번도 야구장을 가본 적이 없는 아이가 있다면 전자가 후자보다 야구를 좋아할 확률이 더 높다. 엄마가 옷에 관심이 많아 어려서부터 집에 옷이 많았다는 학생은 패션 분야를 꿈꿨고, 동물을 좋아하는 부모님 덕분에 어릴 때부터 고양이를 키우며 동물병원을 드나들었던 학생은 수의사를 꿈꾸고 있었다. 


 카페나 식당 창업을 꿈꾸는 학생들의 글에도 부모님의 존재는 부각되었다. 엄마와 함께 다양한 카페를 많이 다녀봤다는 학생은 자신의 개성이 묻어나는 카페를 차리고 싶어 했다. 스위스에서 국밥집을 차릴 거라고 쓴 학생은(왜 하필이면 스위스인지 그 이유가 적혀있지 않아서 설득력이 부족한 글이 되었지만) 깍두기는 엄마한테 조달받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엄마가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 함께 팔 깍두기를 엄마에게 담가 스위스로 보내달라고 할 것이다.


 국밥 레시피 개발보다는 엄마표 깍두기 덕을 보려는 이런 학생이 있는가 하면 벌써 자신만의 레시피를 만들어가고 있는 학생도 있었다. 이 학생은 냉면 가게를 하다가 마라탕 가게로 업종 변경을 한 부모님을 지켜보며 식당 운영의 어려운 점을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의 백종원을 꿈꾸고 있는 학생의 글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부모님을 통해 식당 운영의 좋은 점뿐만 아니라 힘든 점까지 알고 있는 학생이 요식업계의 제왕 자리를 향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니, 언젠가 오픈할 그의 식당은 웨이팅이 어마어마한 핫 플레이스가 되길 바라게 되었다.


3. 제대로 못 쓴 학생들의 모습도 각양각색

 공군 장교, 수의사, 제2의 백종원 등 모든 학생들에게 북두칠성처럼 빛나는 목표가 하나씩 있을 거라 기대할 순 없다. 반, 번호, 이름만 겨우 휘갈겨 쓴 채 백지로 제출한 학생들도 꽤 있다. 자기 이해를 주제로 하거나 진로 탐색 과정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글을 써봐도 된다고 독려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돈 많은 백수'를 희망한다는 학생들에겐 '돈 많은' 부분을 어떻게 해결할 건지 생각해 보자고 했다가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돈은 빌리면 되죠."

 "돈을 어디서 빌리게? 빌리면 갚아야 되잖아. 며칠 전 뉴스에 청년 신용불량자가 늘고 있다고 하던데, 신용불량자가 되면 많이 힘들어져."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뒷자리 학생이 갑자기 끼어들며) "신용불량자가 뭐예요?"

 "쉽게 말하면, 돈 빌리고 못 갚는 사람."

 "돈 못 갚으면 손모가지 자르는 거 아니에요?"

 (또 다른 학생이 끼어들며) "야! 은행이 쓸데도 없는 니 손모가지는 가져가서 뭐 하게?"


 손모가지 이야기로 주변이 시끄러워도 자기 글에 집중하던 한 학생은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성적 때문에 힘들 것 같다는 글을 쓰고 있었다. 

... 그런 걸 하려면 공부도 잘해야 하고 대학도 좋은 데 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이 꿈도 보류 중이다. ㅠㅠ (성적이 안될 것 같은데 어떡해..)


 이 학생의 글에는 여러 분야의 희망 진로가 나열식으로 등장했는데 결국 모두 성적이 안 될 것 같아서 보류 중이라는 결론이었다. 고3도 아니고 아직 중2일뿐인데, 그 일이 꼭 하고 싶다면 공부를 조금 더 해보면 좋으련만. 그래도 이렇게 이것저것 생각해 본 흔적이 남아있는 글에서는 에너지가 느껴진다. 다른 학생이 쓴 아래글에 비하면 더더욱.


 희망 진로 분야가 아직 없다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 그 내용을 적어보자고 했더니 위와 같이 적은 것이다. 까불거리는 장난꾸러기가 저렇게 적었다면 가슴 아플 일까지는 아니었겠지만, 기운 없는 모습으로 조용히 앉아 있는 학생이 자신에 대한 설명으로 '공부를 못한다'을 써놓은 걸 보니 한없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게다가 다른 부연설명도 없이 저렇게 짧은 문장으로 적어두니 마치 자신에 대한 판정을 받아 든 사람 같기도 했다. 아직은 한창 자신의 역량을 키워나가야 하는 시기인데 '공부를 못한다'로 자신을 규정지어버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 교실에 앉아 있는 학생들이라도 면면이 너무나 다르다. 학생들의 글을 읽으니 그들의 개별성이 더욱 와닿았다. 몇 년이 흐른 뒤면 이 학생들은 언제 같은 교복을 입었던 적이 있나 싶게 삶의 양상이 달라져 있을 테다. 개인의 변화뿐 아니라 사회의 변화까지 더해질 테니 학생들의 지금 모습만 보고 그들의 미래를 섣불리 예측할 순 없다. 돈 많은 백수를 향해 열심히 노력한 학생이 사업에 성공하여 젊은 나이에 은퇴한 뒤 정말 돈 많은 백수의 꿈을 이루었다며 행복해할지도 모를 일이다. 


잘츠부르크 근교 할슈타트의 소금광산에 올라가는 길, 이 중학생에겐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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