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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다람쥐 Oct 22. 2023

잘 떠나보내기 위해

| 이게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말이야 |

 중학교 2학년은 중2병이라는 무시무시한 병명이 자동으로 떠오르는 학년이지만, 그런 선입견이 억울할 정도로 귀여운 학생들도 있다. 어두운 기운을 뿜어대는 리얼 중2병 학생들과는 달리 귀엽게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말에는 나도 모르게 큭큭 웃게 된다. 수다와 참견 분야에 국가공인자격증이 있다면 각각 무난히 1급을 취득하고도 남을 ○○이도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는 학생이다. ○○이의 주특기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상투적인 말을 뜬금없는 포인트에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것인데, 며칠 전에는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이게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말이야." 부모나 교사가 진지한 표정으로 했다면 딱 반항하고 싶게 만드는 이 말이 자기들끼리는 저렇게 유쾌한 농담으로 사용될 수도 있구나 싶었다.


 레오폴트가 아들 모차르트에게 한 말도 모두 '너 잘 되라고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자식이 실패하길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좋은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레오폴트의 아들에 대한 간섭과 과잉보호는 모차르트 부자 사이에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낯설지 않은 전개였다.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보호를 받는다. 부모의 보호가 없다면 아기는 생존할 수가 없다.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는 보호의 범위와 정도를 줄여나가고 아이는 혼자서 그 부분을 채워나간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느 선까지가 보호이고 어디서부터는 과잉보호일까. '아직 (A) 살인데 (B)는 해줘야죠'에서 A와 B에 들어갈 말로 옳지 않은 것을 고르는 문제가 있다면, 정답 논란이 있을 것만 같다. 각 가정마다 기준이 미묘하게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과잉보호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가끔은 누가 이렇게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아이의 발달 정도에 따른 오늘의 권장 보호 지수는 47.5입니다. 이는 전년 같은 날 대비 5.3이 줄어든 수치이며, 이 수치를 초과하여 보호할 경우 과잉보호 및 간섭으로 분류됩니다."



| 버려지는 시간과 자원 |

 레오폴트는 자신이 생각하는 최적의 길로 모차르트를 안내하여 낭비되는 시간이 없도록 도와주고 싶었을 것이다. 효율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부모들에게도 종종 볼 수 있는 성향이다. '빨리빨리'의 나라인 우리나라에 살다가 외국으로 이민을 간 이들은 여기서는 당연시했던 빠른 서비스를 그리워한다고 한다.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이 힘든 성향은 우리 경제를 빠르게 발전시키기도 했지만 효율을 중시하고 공백과 여유가 없는 사회를 만든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책 <교육의 차이>를 읽다가 스탠퍼드대를 졸업하고 구글과 IBM을 거쳐 현재는 삼성의 벤처 투자가로 일하고 있다는 저자 친구의 말에 밑줄을 그은 적이 있다. 그는 사람들이 창조적 도전을 할 수 있으려면 버려지는 시간과 자원들(Wasteful time and resources)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버려지는 시간과 자원을 최소화하려고 대학 졸업 후 바로 월급 받는 일을 하기 위해 애썼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충격적인 말이었다. 한편으로는 '어디 한번 버려보자!'하고 눈을 씻고 찾아봐도 버릴 자원이 없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말이다(이러니 내가 창조적 도전을 못하는 거다).


 창조적 도전까지 갈 것도 없이 너무 늦지 않게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고만고만하게라도 살아가길 바라는 경우라도 부모가 제시한 최적의 길은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허비되는 시간이 아까워 부모가 나서면 나설수록 나중엔 그렇게 아낀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견뎌내야 하는 시련이 올 지도 모른다. 내가 알려준 방법대로라면 금방 마칠 것을 자기 방식대로 할 거라며 몇 시간이나 질질 끌고 있는 아이를 보며 속이 터질 때 나는 이렇게 버려지는 시간과 자원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문을 외우며 마음 수양을 한다.



| 보내야 할 때가 언제인지 알고 보내주는 이의 뒷모습 |

 결국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를 떠나 아버지로부터 독립한다. 만약 잘츠부르크 시절의 작품에서 모차르트의 음악적 성장이 멈췄다면 우리가 지금 아는 모차르트는 없었을 수도 있다. 모차르트는 아버지를 떠나 유럽 문화의 중심이었던 빈에서 마지막 10년을 보냈다. 모차르트의 재능을 발견한 순간부터 아들의 성공이 자기 인생의 목표인 것처럼 달려왔던 레오폴트에게 아들의 독립은 빈 둥지 증후군 이상의 상실감을 가져다줬을 것이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이 아름답다고 했던가. 자식을 보내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분명히 알고 보내주는 부모의 뒷모습도 아름다울 텐데, 레오폴트는 아름다운 뒷모습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그 영향력을 단절하는 것은 성인으로서 자신만의 자유와 목표를 쟁취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절차라고 한다. 그런데 이 핵심적인 절차를 밟는 시기가 점점 늦어지고 있다. 취업이 힘들고 주거 마련이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조바심이 난 부모가 사회에 내보낼 준비를 더 잘하기 위해 애를 쓰면 쓸수록 아이는 독립성보다 의존성을 키워나간다. 진로 수업을 하며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도대체 부모가 어디까지 도와주길 바라는 걸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런 생각을 한 날이면 집에 있는 중학생과 부모의 지원에는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를 자꾸 하게 된다. 단, 나의 경우 애를 봐달라는 부탁은 들어줄 의향이 있다고 덧붙이면서.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의 애 봐달라는 부탁을 거절했지만 말이다.

 다름이 아니라 그 녀석이 두 아이를 맡아주십사 부탁한 거다. 사육제 도중부터 독일을 거쳐 영국으로 여행하고 싶어서라는구나.
- 1786년 11월 17일,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가 딸 난네를에게 쓴 편지 중에서 -


 처음 담임을 했던 학생들이 벌써 삼십 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학생들도 변했고 사회도 변했다. 당시 우리 반 아이들과 만들었던 학급문집이 빗살무늬 토기와 같이 까마득한 고대 유물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다시 한번 이십 년이 흐른다면 학생들과 우리 사회는 얼마나 더 변해 있을까. 어느 정도의 변화가 있을지 상상하기도 힘든다. 변치 않는 게 있다면 학생들이 자라서 언젠가는 독립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집에 있는 중학생도 마찬가지다. 궁극적으로는 아이의 독립을 돕고 있어야 할 과정이 오히려 의존성만 키우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본다. 아이가 떠날 때를 알고 아름답게 보내주어야 하는 나의 역할 수행이 너무 험난하지만은 않길 바란다.


시티투어 택시에 그려진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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