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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다람쥐 Aug 13. 2024

중2병 백신을 23년간 맞아온 결과

4억 3천만 원어치 지폐 돈가루 의자에 앉아

잼민이라 불려서 기분 나쁜 중학생 

 "엄마, 저 커플이 뭐라고 한 줄 알아? 나를 슬쩍 보더니, 남자가 여자한테 '잼민이도 체리에이드 마시잖아. 너는 체리에이드 말고 다른 거 마셔.' 이랬어!! 하, 참... 어이가 없어서. 나보고 잼민이래! 나보고!"

 아이는 중학생의 명예에 큰 스크래치가 난 듯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내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옆 테이블에 들리지 않도록 소리를 낮춰서. 하지만 표정에도 소리가 있다면 표정만큼은 아주 큰 소리였다.


 나는 잼민이의 정확한 정의를 잘 모른다. 딸아이는 잼민이를 초등학생의 유의어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왜 기분 나빠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지만 나는 그 모습마저 귀여울 따름이었다. 


 잠깐! 지금 중2를 보고 그저 귀엽다고 했단 말인가. 마치 중2병이라는 말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아니면 다른 중2들은 몰라도 내 눈앞의 중2는 그런 무시무시한 병 따위와는 상관없다는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 있는 걸까?

아이가 마신 체리에이드


중2병 백신을 23년간 맞아온 결과 

 물론 우리집에 사는 중2도 다른 중학생들과 비슷한 점을 다분히 가지고 있다. 다만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중학교 교사 23년 차인 나는 이미 그보다 훨씬 더한 행동을 무수히 많이 봐왔기 때문에 '그러려니'가 비교적 잘 되는 편이다. 나의 교직 생활은 내 심신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지만(각종 질환을 얻음), 중2병 백신을 쉴 새 없이 맞아온 지난 세월 덕분에 내 아이의 중2병 증상에는 '이 정도면 양반이지'로 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아는 게 병이라고, 많이 알면 알수록 걱정되는 게 많은 법이다. 고등학교 근무 경험이 없기 때문인지, 나는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아이의 고등학교 시기보다 중학교 시기가 걱정되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는 아이들이 한 교실에 모여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학생에 따라 질풍노도의 양상이 얼마나 천차만별로 다른지를 매년 목격했다. 교실에서 보는 것이 전부도 아니었다. 때에 따라 가정에 연락을 하여 학부모와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많은 학부모들이 중학생 아이를 힘겨워했다. 특히 아이가 집에서는 방문도 닫고, 입도 닫고, 마음도 닫고 지낸다고 말하는 경우는 같은 엄마 입장에서 내 마음도 많이 아팠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수많은 중학생들은 나의 데이터베이스가 되었다. 1학년 때 모범생이 3학년 때 이상해지는 경우도 봤고, 2학년 때 모두를 잡아먹을 듯한 사나운 눈빛으로 유명했던 학생이 다음 해 온화한 눈빛으로 졸업하는 경우도 봤다. 불안한 시기인 동시에 변화가 많은 시기라는 걸 알기에 우리집 중학생이 "아무도 날 막을 수 없어!"와 같은 허세 가득한 말을 내뱉더라도 그러려니 한다.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학생들이 많이 봤기에 우리집 중학생에겐 숨만 쉬고 있어도 부모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말을 시시때때로 한다. 그래서 아이는 가끔 내게 인심 쓰듯 이런 말을 한다. 

 "엄마, 이리 와 봐. 내가 엄마 앞에서 숨 쉬어 줄게. (들숨)씁~ (날숨)후~"



4억 3천만 원어치 지폐 돈가루 의자에 앉아서 

 숨만 쉬어도 귀여운 것은 사실이나, 숨 쉬면서 웹툰만 보거나 숨 쉬면서 세븐틴 덕질만 하고 있으면 '얘가 앞으로 뭐 먹고 살려나' 걱정이 되는 것이 부모 마음이다. 사회 어느 곳에서도 숨 쉬는 걸로 월급 주는 곳은 없으니 말이다. 필라테스 등록을 하고 싶어도 이번달 생활비를 보며 결국 등록을 포기하는 내가 떠오른다. 내 앞에서 체리에이드를 마시고 있는 얘는 생활비 걱정을 덜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음료를 얼추 다 마시고 엉덩이를 들썩이며 또 다른 금고문을 보고 있다.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서 오른쪽에 있는 금고문을 들여다보면 골드바케이크 파는 곳이 보이고, 왼쪽 금고문을 들여다보면 한국은행 아카이브실이 보인다. 우리는 음료를 정리하고 4억 3천만 원어치의 지폐 돈가루가 있는 한국은행 아카이브실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보이는 벽면에는 부산근현대역사관에 대한 영상이 비치고 있었고, 그 반대편에 지폐 돈가루가 든 케이스(?)가 있었다. 여기 앉아서 영상을 보라는 의도 같았다. 그렇다면 잠시 앉아서 부산근현대역사관의 변천사를 봐야지. 앉으며 옆을 보니, 예측불가 행동을 일삼는 중2는 8천7백만 원어치의 돈가루 의자 위에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딸: 어? 엄마 앉아 있는 의자는 4억 3천만 원이라고 적혀있네? 우리 자리 바꾸자.

 엄마: 더 큰 금액 위에 앉는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뭘...

 딸: 이 돈가루 다시 붙여서 쓸 수는 없나?

 엄마: 다시 붙인다고 해도 네가 가질 수는 없어. 네가 가질 수 있는 돈은 네가 번 돈뿐이야.

 

 아이는 돈을 왜 가루로 만들고 그러나, 이럴 거면 나한테나 주지, 오만 원짜리 돈가루는 만 원짜리 돈가루보다 색깔도 예쁘다는 둥 중2스러운 말을 이어갔다. 나는 여기 우리 밖에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의 대화를 아무도 듣지 않아서.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아이가 이런 말을 늘어놓지 않았을 텐데, 우리 밖에 없으니 아이의 저런 헛소리(?)를 듣는 시간을 누릴 수 있어서.


 헛소리와 쓸데없는 소리라도 자꾸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쓸모 있는 소리가 섞이게 된다. 이런 헛소리라도 들을 수 있는 중2 엄마는 입도 닫고 마음도 닫은 중2의 엄마보다 훨씬 상황이 낫다는 것도 사실이다. 23년간 맞아온 중2병 백신은 아이의 헛소리에도 고마움을 느끼게 해 준다. 나는 이 고마운 마음을 끌어안고 끙차, 몸을 일으켜 세웠다. 4억 3천만 원어치 돈가루 의자에서 일어나 두꺼운 금고문을 통과하여 나가며 생각했다. 걱정은 걱정이고, 귀여움은 귀여움이라고. 얘가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지 걱정하는 마음이 아이를 귀여워하는 마음을 온전히 덮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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