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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다람쥐 Aug 08. 2024

엄마는 뭐에 청춘을 걸었어?

깡통시장에서 팥빙수를 먹으며

 | 제철 음식 교양 대백과 178쪽에 나오진 않지만 |

 제철 음식에 대한 식견을 갖춘 교양인이라면 여름철 팥빙수 섭취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 '제철 음식 교양 대백과' 178쪽에 나올 법한 이 문장을 읽고 혹시라도 제철 음식의 정의를 떠올리지 않길 바란다. 제철에 나는 재료로 만드는 음식이 제철 음식인데 팥빙수의 재료인 팥, 우유, 떡 중 도대체 무엇이 여름에 나는 제철 재료냐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백스텝을 하며 팥빙수 가게로 도망치련다.


 자녀교육에 진심인 나는 딸아이에게도 여름철 팥빙수 섭취에 관한 나의 철학을 설파했다. 엄마가 하는 말 중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만 취하는 중학생 딸은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가르침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자고로 앎은 행함으로써 완성된다. 우리는 깡통시장에 서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부지런히 행함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머뭇거리거나 '내일의 내가 실천하겠지'라는 안일한 태도로 미루는 것은 결코 허용될 수 없었다. 우리 모녀는 더 이상 진지할 수 없는 표정으로 지도앱을 켜서 '팥빙수'를 검색했다.


 딸: 엄마, 내가 아주 괜찮은 집을 발견했어!

 엄마: 여기서 가까워?

 딸: 응, 조금만 가면 돼. 나만 믿고 따라와.


 우린 둘 다 깡통시장이 처음이었고, 미리 검색해 둔 맛집이 없었으며, 그 순간 팥빙수를 먹겠다는 생각도 즉흥적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눈빛을 반짝이며 자기만 믿으라는 딸이 안내한 곳은 무려 '팥 맛에 청춘을 걸었다'는 가게였다.




| 나는 뭐에 청춘을 걸었지?  |

 청춘을 건 팥 맛을 보고자 하는 이에게 어울리는 자세란 무엇일까. 나는 '청춘을 걸었다'는 말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한 채 팥빙수를 주문했다. 


 엄마: 팥 맛에 청춘을 걸었다니, 단팥계의 장인이라고 해도 되겠네. 너, 무슨무슨 마이스터고등학교 들어봤지? 그 마이스터가 독일어로 장인을 말하는 거야. 어떤 기술 분야에서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 어때? 청춘을 건 팥 맛이? 맛있어?

 딸: 응, 맛있어.

 엄마: 장사를 위한 약간의 과장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저렇게 '청춘을 걸었다'는 표현을 간판에 써붙일 정도로 노력했다는 건 정말 멋진 것 같아.


 세상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멋짐을 발휘하며 살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누군가는 컴퓨터 앞에서 코드를 짜며 자신의 멋짐을 발휘하고, 누군가는 이렇게 단팥을 끓이며 자신의 멋짐을 발휘한다. 더불어, 청춘을 건 분야에 따라 밥벌이의 종류가 달라진다는 사실도 생각해 봄직하다. 


 엄마: 너는 어디에 청춘을 걸고 싶어?

 딸: 딱히 청춘을 어디 걸고 싶지 않은데? 난 그냥 청춘을 살고 싶은데?

 

 아... 중학생과 대화하다 보면 가끔 내가 쓸데없이 비장하다는 걸 실감한다. 맞는 말이다. 청춘을 그냥 살아내기만 해도 되지, 뭘 어디 걸려고. 난들 내 청춘을 어디 걸긴 했었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내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애가 물었다.


 딸: 엄마는 뭐에 청춘을 걸었어?

 엄마: 으응? 내 청춘? 글쎄... 잘 모르겠네.

 딸: 모르기는 뭘 몰라. 나 키우는 데 걸었겠지.

 엄마: 넌 어쩜 그렇게 심쿵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 해? 어? 근데 청춘이 몇 살부터 몇 살까지야? 30대는 너 키우는데 걸었지만 20대엔 네가 없었는데? 


 이후 이어진 우리의 대화는 나의 재미없는 대학 생활과 더 재미없는 임용시험, 논문 등을 주제로 더 길게 이어질 뻔했으나 테이블 회전이 빠른 팥빙수집에 누가 되지 않게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팥빙수 가게를 나오며 다시 한번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나의 30대를 걸고 키운 딸의 옆모습도 한번 흘깃. 사장님이 공들여 끓인 팥을 내가 공들여 키운 딸과 함께 먹어본 이 경험은 여름철 팥빙수 섭취를 소홀히 하지 않는 교양인으로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이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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