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팝업스토어 '북촌 조향사의 집'에서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다. 부모님을 간병하는 자식의 마음이 처음엔 지극정성이었더라도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마음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시간, 노력, 비용이 계속 드는 일에 한결같은 태도를 유지하기란 힘이 드는 법이다.
그렇다면 부모님 간병 자리에 자식 부양을 넣어보자. 긴 자식 부양에 좋은 부모 없다는 말도 가능하지 않을까? 대학 졸업만 시키면 자기 살 길 찾아갈 거라고 기대했던 자식이 30대가 되어서도 중, 고등학교 시절 지내던 방에서 계속 부모가 해주는 밥을 기다리고 있다면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자식이니 이유식 받아먹을 때 기뻤던 그 마음 그대로 계속 행복하기만 할까?
통계청에 따르면 '그냥 쉬는' 청년이 44만으로 역대 최대라고 한다. 이들 중 대다수인 75%는 구직 의사가 없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 이유로는 '원하는 임금 수준이나 근로 조건이 맞는 일거리가 없을 것 같아서'가 42.9%였다. 청년들의 눈높이에 맞는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좋은 일자리는 한정적이고, 그 적은 자리를 두고 벌이는 경쟁은 치열하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이 조금이라도 더 경쟁력을 갖추길 바라는 마음에서 열심히 공부를 시킨다. 그런데 공부는 시킨다고 잘하게 되는 게 아니다. 게다가 입시는 상대평가여서 내가 제법 잘해도 옆 친구가 더 잘하면 나의 잘함은 약해진다. 성적이 내 일자리를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다. 성적 우수자들의 의대 쏠림 현상도 이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닌가. 적어도 의사 면허는 고소득의 일자리를 보장해 줄 것 같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기에.
그러니 나는 중학생 딸아이에게 무조건 공부만 열심히 하라는 말을 못 하겠다. 다른데 눈 돌리지 말고 지금은 공부만 열심히 해야 한다는 식의 말을 못 하겠다. 공부를 등한시하라는 말은 아니다. 내가 직장과 가정에서 내 역할에 충실한 것처럼 너도 공부하는 학생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은 한다. 하지만 아이가 수능이 인생의 목표인양 달리다가 한정된 좋은 자리를 차지하지 못해 '그냥 쉬는' 청년이 되어버리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 부모로서 어떤 도움을 주어야할지를 계속 고민하게 되는 이유다.
신문을 읽다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분야를 개척해 나가는 청년 사업가 이야기가 있으면 유심히 읽어두었다가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이야기해주곤 한다. 책을 읽다가 새로운 인사이트를 얻으면 아이에게도 알려주는 편이다. 유튜브에서 해외 동향에 대한 뉴스를 들으면 아이의 흥미를 끌법할 주제를 골라 전달해 준다. 교과서와 문제집만 보는 게 아니라 세상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아이는 대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끔은 재미있어하기도 한다.
집 밖을 나가면 신문, 책, 유튜브가 아닌 경로로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가 펼쳐진다. 세상에는 다양한 일이 존재하지만 아이의 눈에는 소비자와 직접 대면하고 있는 일만 보이기 마련이다. 이때 어른이 조금 거들어주면 아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이번 부산여행에서 '북촌 조향사의 집' 팝업 스토어를 들른 것도 우리가 자주 접하지 못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시장에는 7천 원을 내면 할 수 있는 향 블렌딩 체험이 있었다. 조향이 들어가는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설명처럼 여섯 가지 향료 중 하나를 골라 베이스에 섞기만 하는 아주 간단한 체험이었다. 전시물을 휙 둘러보기만 하는 것보다 단 5분이라도 직접 체험하는 활동이 의미 있을 거라는 생각에 7천 원을 결제했다. 아이는 안내해 주시는 분의 설명에 따라 향료를 고른 뒤 저울의 숫자를 보며 스포이드에서 향료를 떨어트렸다.
전시관을 둘러보고 짧은 체험까지 마친 우리는 바로 옆에 붙어있는 오설록 티하우스에 들어가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 전시관 화이트보드에 화학식 쓰여있던 거 봤지? 너 초등학교 때 왔으면 그게 그림인지 낙서인지 아무것도 몰랐을 텐데, 올해 원소 기호 배워서 아는 것 좀 보였겠네?
딸: 악! 원소 기호 너무 싫어! 난 그거 일부러 안 쳐다봤는데?
엄마: 그렇군. 조향사 되려면 화학과 가는 게 좋다던데 네가 볼 때 조향사 좋아 보여?
딸: 응. 좋아 보이긴 한데 나는 안 하고 싶어.
엄마: 그럼 조향사는 하고 싶은데 화학이 싫다는 친구가 있다면 뭐라고 말해주고 싶어?
딸: "니가 아직 세상을 모르는구나." 이렇게.
아이는 중2가 되어 과학시간에 원소 기호를 배웠다. 시험 범위에 들어가기 때문에 열심히 외웠던 원소 기호가 실제로 이런 데서도 쓰인다는 걸 알고 반갑지 않았을까 기대하며 물어본 질문이었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걸 짚어주고 싶었던 엄마와 과장된 표정으로 원소 기호가 싫다고 외치는 중2의 대화는 맛있는 녹차 아이스크림 덕분에 계속 이어졌다.
엄마: 우리가 쓰는 화장품, 샴푸, 세제 등 많은 생활용품에 향이 들어가잖아. 그런데 샴푸를 사면서 향에 관한 일을 하는 사람이 이 제품이 만들어지는데 관여했을 거라는 생각은 못해봤지?
딸: 그런 거 생각하면서 샴푸 사는 사람이 어딨어!
엄마: 그래, 그건 그렇지. 그런데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니까 다른 많은 제품에도 네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분야의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관여했을 거라는 걸 알 수 있겠지? 네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어?
내친김에 커리어넷에 들어가서 조향사를 검색한 결과를 보여줬다. 임금 수준 및 직업만족도, 학력분포 및 전공계열을 보다가 문득 키자니아가 떠올랐다. 키자니아는 아이가 유치원 다니던 시절에 다녀온 직업 체험 테마파크다.
엄마: 조향사 학력분포에 대학원졸과 박사졸이 이렇게나 많네. 오늘 스포이드에서 향료 몇 방울 떨어트리는 체험으로는 조향사에 대해 알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는데 말이야. 너 어릴 때 키자니아에서 소방관 체험했던 거 생각나지? 빨간 불빛을 향해서 물 쏘던 체험. 네 생각에 소방관 모자 쓰고 그렇게 물 한번 쏘는 걸 소방관 체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딸: (유치원생들의 체험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진짜 불구덩이에 인형 하나 던져놓고 뜨거운 열기를 견디며 그 인형을 구해오라고 시켜야 진짜 소방관 체험이지! 그게 무슨 체험이라고 쯧쯧...
엄마: 너도 어릴 때 소방관 체험 했었잖아? 엄청 뿌듯한 표정으로.
딸: 과거는 이야기하지 마.
허세가 특기인 중2는 가끔 유치원생과 초등학생들을 깔보는 듯한 말을 하곤 한다. 자기도 그 시절을 거쳐왔다는 걸 상기시켜 주면 과거는 이야기하지 말라며 입막음을 한다. 20대가 된 아이에게 중2 시절의 네 모습이 얼마나 허세로 가득 차 있었는지를 알려주면 그때도 과거는 이야기하지 말라고 할지 궁금해진다.
'그냥 쉬는 청년 44만 시대'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으면 안 그래도 걱정이 특기인 엄마의 마음에 걱정이 휘몰아친다. 걱정한다고 걱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아이와 이런 대화를 나누며 걱정하는 시간을 줄여본다. 비장한 표정의 물총 쏘기에 지나지 않았던 유치원 시절 소방관 체험을 가소롭게 여기는 중학생을 보며, 원소 기호는 꼴도 보기 싫지만 향 블렌딩 체험은 살짝 재미있었던 중학생 시절은 언제쯤 가소롭게 여기게 될지 궁금해한다.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 시기의 아이가 '그냥 쉬는' 청년은 아니길 바라며, 나는 아이와 나눌 이야기의 소재를 신문, 책, 유튜브,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하는 여행에서 모아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