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트니스 센터 입구를 스쳐 지나가며
"엄마, 오늘 가는 호텔은 몇 성급이야?"
"4성급"
"왜 5성급이 아니야?"
"그건 내 지갑한테 물어봐. 나는 몰라."
왜 5성급이 아니냐니, 마치 5성급 호텔에 자주 가는 모녀의 대화처럼 들리지만 우리는 부산에서 5성급 호텔 숙박을 해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우리만의 철학이 있거나 특별한 사연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누구나 다 추측할 수 있는 그 이유. 5성급 호텔은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해운대에도 몇 번이나 왔었지만, 늘 바닷가에서 꽤 걸어 들어가야 하는 위치의 호텔에 머물곤 했다. 바닷가에 가까운 호텔일수록 더 비쌌으니까.
이번 부산 여행을 준비하며 가장 먼저 한 일은 기차표 예매였다. 그다음은 숙소를 결정하는 일.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10만 원대로 예산을 한정한 뒤 호텔을 검색했다. 그러다 문득 웨스틴 조선호텔의 위치가 무척 좋아 보였던 기억이 났다. 언젠가 해운대 백사장에 앉아 웨스틴 조선호텔 쪽을 바라보며 '저기 숙박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몇 발자국 안 가면 룸으로 들어가겠구나. 나는 모래 털고도 한참 더 걸어가야 되는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사람마다 숙소에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금액대가 다 다르겠지만 나는 20만 원이 넘어가면 내 형편에서는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이유로 해운대에 있는 호텔 중에서 웨스틴 조선, 파라다이스, 시그니엘, 그랜드 조선 등은 내가 갈만한 곳이 아니라는 딱지를 붙여두었다. 이렇게 내 마음속 분류를 이미 완료했는데, 웨스틴 조선이 떠오르다니. 모래 털고도 한참을 더 걸어가던 그때의 내가 백사장에 붙어있는 웨스틴 조선의 위치를 어지간히도 좋게 봤었나 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웨스틴 조선의 가격을 검색하기에 이르렀다. 작년에 비해 갑자기 가격이 뚝 떨어졌을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하는 마음으로. 주변에 좋은 호텔들이 많으니 연식이 좀 있는 호텔은 가격이 내려가는 게 자연스럽지 않겠냐는 바람을 가지고. 자주 가는 것도 아니니 20만 원대까지는 용기 내어보겠다는 마음으로. 클릭, 스크롤, 클릭, 스크롤. 그 결과, 성수기엔 그냥 성수기와 극성수기가 있다는 걸 확인했다. 내 눈에 보이는 가격은 우리가 가려던 7월 말이 극성수기에 해당한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원한 날짜의 오션뷰 객실 가격은 40만 원을 훌쩍 넘어 50만 원에 육박했다.
'에라 모르겠다'하고 지르는 것도 능력이라면, 나에겐 그런 능력이 없다.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다. 고민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는 듯 너무나도 당연하게 검색창을 닫았다. 고려해 볼 만한 수준의 금액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일을 어쩌랴. 20만 원대까지는 용기 내어보겠다고 마음먹었던 여파가 남아버렸다. 이번엔 10만 원대에서 한번 벗어나볼까 하는 마음이 일렁였다. 10만 원대만 생각하다가 20만 원대를 떠올리면 비싸게 느껴지지만 40만 원대를 보고 오면 20만 원대가 다르게 느껴지는 법이다. 마침 신라스테이가 내 눈에 들어왔다. 4성급, 20만 원대, 해운대 백사장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되는 거리. 그래, 이 정도면 훌륭하네. 모래 털고도 한참 더 걸어가던 때의 내가 모래 털고 길 하나만 건너면 되는 나를 본다면 적잖이 부러워할 것 같았다. 나는 큰 마음을 먹고 신라스테이 해운대를 예약, 결제했다. 2박 3일 일정 중 1박만. 2박 모두는 무리가 아닌가. 사람은 그렇게 갑자기 바뀌지 않는다. 내 월급이 갑자기 바뀌지 않는 것처럼.
"엄마, 여기 좀 와봐. 여기서 바다가 보여."
체크인 후 객실로 들어간 아이가 창 밖을 바라보며 나를 불렀다. 오션뷰와 시티뷰는 몇 만 원의 가격 차이가 난다. 지금까지의 나라면 당연히 몇 만 원을 아낄 수 있는 시티뷰를 선택했겠지만 웨스틴 조선의 대체제로 신라스테이를 선택한 나는 오션뷰를 선택하는 용기를 보였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바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창 밖 풍경이 "여기는 해운대! 해운대!"를 외치고 있었고, 나는 그 성화에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돌려 몇 번이나 그 풍경을 바라봤다.
"넌 5성급 호텔의 조건이 뭔 줄 알아? 무엇을 갖추어야 5성급 호텔이 되는지?"
5성급 호텔에 대한 미련이라도 남은 걸까. 4성급 호텔 객실에 앉아서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뭘까. 그건 내가 유튜브 "조승연의 탐구생활" 구독자로서 호텔의 역사에 관한 그의 영상을 보며 5성급 호텔의 조건에 대해 주워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자기가 그걸 알 턱이 있겠냐는 듯 눈만 꿈뻑꿈뻑했고, 알고 있는 사실을 얼른 이야기해주고 싶어 안달 난 엄마는 아이에게 충분히 생각해 볼 시간을 주는 미덕 따위는 개나 줘버린 채 말을 이어갔다.
"방이 얼마나 좋은지에 따라 5성급이 되는 게 아니야. 호텔의 역사를 보면 말이야."
아이는 얼떨결에 호텔의 역사에 대한 엄마의 설명을 듣고 앉아있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해운대에서 이런 참사가 일어나는 걸 막으려면 앞으로 엄마가 "조승연의 탐구생활"을 보는 걸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엄마의 설명을 중지시키거나 듣기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가는 남은 여행 동안 엄마가 지갑을 여는 횟수를 줄일 수도 있다고 머리를 굴리며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표면적으로는 아이가 내 설명을 잠자코 듣고 있었기에 나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그 영상을 통해 알게 된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호텔의 역사를 설명하는 그의 영상에 따르면, 호텔의 시작은 내국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 들른 외국인이 자기 나라에서 하던 일상을 그대로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먹던 음식을 먹고, 평소처럼 운동을 하고, 일을 하고, 씻고, 잠을 잘 수 있는 곳.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만든 곳이 호텔이었다. 호캉스가 유행인 요즘은 외국인보다 내국인 숙박객이 더 많은 호텔이 대부분이겠지만 호텔의 시작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 국제 무역이 싹트던 시기를 떠올려보면 그려질 법한 그림이다.
영상을 본 뒤 조금 더 알아보고 싶어서 한국관광협회중앙회의 자료를 찾아봤었다. 호텔의 별 개수에 따른 특징을 정리한 표에 의하면, 수면과 청결 유지에 문제가 없도록 객실과 욕실을 갖추고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최소한의 F&B 부대시설을 갖추면 2성이 된다. 거기에 부대시설의 종류가 더 많아지면서 3성, 4성, 5성으로 올라간다. 3개 이상의 레스토랑, 비즈니스센터, 대형 연회장, 국제회의장, 피트니스 센터 등의 부대시설을 갖추면 5성급 호텔이 될 수 있다.
호텔의 역사와 5성급 호텔의 조건을 함께 생각해 보았다. 타국에 머물면서도 일상생활을 그대로 이어서 할 수 있게 만든 장소인 호텔에서 평소에 하던 일을 이어갔을 사람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들은 자기 나라에서 그랬던 것처럼 편한 침대에서 자고(객실 침대), 자기가 먹던 음식을 먹고(레스토랑), 평소처럼 운동을 하고(피트니스 센터), 자기 일을 열심히(비즈니스 센터, 연회장, 회의장) 했겠지. 그렇게 생각해 보니 5성급 호텔의 조건이란 이들의 평소 삶이 아닌가. 5성급의 삶이라니, 매일의 삶을 5성급으로 만드는 비법이라도 알아낸 기분이었다. 운동해야 되는데 생각만 하고 몇 년째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깨우침이었다.
평소에도 운동을 하지 않는 나는 당연히(?) 여행지에서도 운동을 하지 않는다. 호텔 숙박을 하며 단 한 번도 피트니스 센터에 가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5성급의 삶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을 얻은 자로서 이번에는 피트니스 센터 문 앞까지 가보는 발전을 이루었다. 운동이 일상의 루틴으로 자리 잡은 사람들이 정말 멋지다는 생각을 하며 약 3초간 빼꼼히 들여다본 것이 전부이긴 했지만.
얼떨결에 엄마 손에 이끌려 피트니스 센터 입구까지 따라온 딸아이는 엄마의 깨달음을 전해 들어야만 했다. 5성급 호텔에서의 휴가도 좋지만 매일의 삶을 5성급의 삶으로 만드는 게 더 좋겠다고 말하는 엄마의 표정이 마치 세상이 숨겨놓은 엄청난 비밀을 알아낸 사람의 표정 같았겠지. 아이의 표정은 다소 영혼이 없어 보였으나 화제 전환을 시도하지 않는 걸로 봐서 엄마의 흥을 깨지 않으려는 갸륵한 마음이 느껴졌다. 그 갸륵한 마음을 보고 있자니, '학생의 5성급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연설은 조금 뒤로 미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 정도 양심은 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