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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누적 턱걸이 횟수는 0회이지만

by 책다람쥐

혹시 턱걸이를 할 수 있는 여성을 본 적이 있는가? 내 주변엔 턱걸이가 가능한 여성이 단 한 명도 없다. 당연히 나도 못한다. 어딘가에선 턱걸이를 턱턱 해내는 멋진 여성들이 자기들끼리 친목을 도모하고 있을 것 같지만 가까이서 그들의 존재를 본 적은 없다. 나에게 턱걸이 기능 보유자는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보유자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내가 판소리 수궁가를 완창하지 못한다고 해서 내 삶이 크게 나빠지지는 않는다. 턱걸이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 어딘가엔 그걸 잘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나는 굳이 욕심내지 않는 일, 나에겐 그런 능력이 없다고 단정 짓고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일, 나에게 판소리나 턱걸이는 그런 성격의 일이었다. 그러니, 40대 중후반까지 지켜온 기록인 생애 누적 턱걸이 횟수 0회는 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 유지해도 하나 아쉬울 것이 없었다. 헬스장에서 어시스트 풀업 머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시스트 풀업 머신은 턱걸이를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도움(어시스트)을 주어 턱걸이(풀업)가 가능하도록 해주는 운동 기구이다. 이 고마운 기구의 도움이란 어시스트 무게를 걸 수 있는 받침대를 제공하는 일이다. 100kg의 몸무게를 가진 사람이 그 받침대에 50kg의 무게를 건다면 100kg에서 50kg을 뺀 50kg만 들어 올리면 된다. 대부분의 운동 기구에서는 무겁게 설정할수록 운동이 힘들어지지만 어시스트 풀업 머신은 무겁게 설정할수록 자기 몸을 들어 올리기가 쉬워진다. 설정한 무게가 도움(어시스트)으로 제공되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나는 헬스장에 있는 운동 기구 중에서 어시스트 풀업 머신을 가장 좋아한다. PT 10회 차에 처음으로 이 운동 기구에 올라갔던 날,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듯한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오늘은 턱걸이를 해볼게요."

"네? 제가 턱걸이를요? 저 턱걸이 못해요. 철봉에 그냥 매달리기만 하는 것도 금방 떨어져요."

"이걸로 하면 할 수 있어요. 이건 어시스트 풀업 머신이고요, 처음에는 자세부터 잡아야 하니까 쉽게 할 수 있도록 무게는 이 정도로 해볼게요. 자, 천천히 올라가 보세요."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위에 있는 손잡이를 잡고 받침대에 무릎을 얹었다. 받침대는 고정식이 아니었다. 내가 올라가니 내 몸무게로 인해 받침대가 아래로 쑥 내려갔다. 손잡이를 잡고 매달려있지만 올라가는 힘을 가진 받침대가 나를 받치고 있는 상황. 거기서 팔과 등에 힘을 주고 나를 위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내 몸에 스르륵 올라갔다. 놀이터에 있는 철봉에서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날개를 펼치듯 뻗어 올린 팔과 등의 힘으로 하늘을 향해 나를 끌어올리는 기분. 어시스트 풀업 머신은 나의 턱걸이를 어시스트 해줌과 동시에 이런 기분을 선사해 주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턱걸이 사돈의 팔촌 비슷한 것조차 해본 적이 없는 나에겐 너무나도 새롭고 신기한 기분이었다.


어시스트 풀업 머신에서 나를 끌어올리다 보면 등 뒤 허리 위부터 겨드랑이 쪽까지 넓게 펼쳐진 광배근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진다. 마치 하늘로 날아오르기 위해 날개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광배근에 힘이 들어가는 건 랫풀다운을 할 때 이미 느껴본 적이 있다. 광배근은 Latissimus Dorsi라고 하는데 운동 기구 랫풀다운의 랫이 Latissimus의 Lat이다(처음에 나는 랫풀다운의 랫이 Let me pull down 할 때의 Let인가 궁금했었다). 내가 처음으로 광배근의 꿈틀거림을 알아차린 순간은 랫풀다운을 할 때였지만, 랫풀다운에서는 광배근이 날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고 바를 내 쪽으로 끌어당기는 운동에서 날개를 떠올릴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나를 하늘 쪽으로 끌어올리는 어시스트 풀업 머신에서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날개가 떠오른다.


비록 어시스트를 받아야만 하는 처지이지만 이 기구에서 풀업을 하는 동안은 내가 하늘을 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처럼 느껴진다. 양손을 넓게 잡고 가슴을 쫙 편 채 나를 끌어올리고 있으면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마저 든다. 처음 해보는 턱걸이에 감격한 자의 황홀함일까, 동네 공원 철봉에서 아침마다 운동하는 아저씨들도 매일 느끼는 기분일까. 그 아저씨들에게 "턱걸이할 때 어떤 기분이신가요?"라며 인터뷰할 자신이 없는 나로서는 조심스럽게 추측만 해볼 뿐이다. 그분들도 등 뒤의 날갯짓이 주는 자신감은 느끼지 않을까 하는 추측 말이다.


나는 어시스트 풀업 머신 위에서 내 등에 숨어있던 날개의 존재를 확인했다. 광배근의 날갯짓은 나를 고양시킨다. 이 날갯짓을 추진력 삼아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차오른다. 출근길에도 괜히 어깨를 쫙 펴고 광배근에 힘을 한번 줘본다. 나를 날아오르게 할 날개가 펼쳐진다.


어시스트 받아서 하는 턱걸이는 1회로 쳐주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생애 누적 턱걸이 횟수 0회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광배근의 날갯짓과 함께 어깨를 펴고 힘차게 시작하는 아침은 운동하는 동안 계속 이어졌다. 몸과 정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진리는 운동을 하면서 가장 크게 깨닫게 되는 사실이다. 운동이 생활에 활력을 준다는 말은 운동 업계 관련 종사자들이 지어낸 말이 아니었다. 운동은 몸 건강은 물론이고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을 준다. 생애 누적 턱걸이 0회 기록 보유자의 명예를 걸고 자신 있게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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