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으로 쳇바퀴 도는 삶을 살다 보면 평소 쓰고 듣는 말이 거기서 거기다. 가끔 애가 친구들에게 듣고 와 알려주는 희한한 줄임말을 제외하면, 집이나 직장에서 새로운 어휘나 표현을 듣게 되는 경우는 잘 없다. 늘 사용하는, 그래서 익숙해진 어휘나 표현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나에게 헬스장은 운동하는 장소인 동시에 익숙지 않은 어휘와 표현이 넘쳐나는 신기한 세계였다. 펙덱플라이 같은 운동 기구나 트라이셉스 같이 어려운 근육 이름뿐만이 아니다.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어휘도 이 세계에서 맞닥뜨리니 낯설게 느껴지는 게 많았다.
"코어를 잠그세요!"
"네? 잠가요? 어떻게요? 이게 잠그고 열고 할 수 있는 거였나요?"
지금까지 내가 잠글 수 있었던 건 '문', '가스밸브', '물' 정도가 전부였다. '문을 잠그다', '가스밸브를 잠그다'라는 말은 나에게 매우 자연스럽게 들린다. 그런데, '코어를 잠그다'라니. 코어가 잠글 수 있는 거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살아온 나는 갑자기 문을 잠그지 않은 채 외출해 버린 사람처럼 초조해졌다. '코어를 어떻게 잠가요?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잠근 적이 없는데, 그럼 전 이걸 계속 열어두고 산 건가요?'
코어는 몸의 중심부 근육을 말한다. 선생님이 말하는 '코어를 잠그다'는 배에 힘을 준 채 힘이 빠져나오지 않도록 단단히 유지하는 상태였다. 복압을 유지한 상태로 고정하라는 말 같은데, 물론 나는 그걸 잘 못한다. 그래서 "코어가 풀렸어요. 코어 잠그고!" 소리를 종종 듣는다. 이 말로 미루어보아, '코어를 잠그다'의 반대말은 '코어를 열다'가 아니라 '코어가 풀리다'인 듯하다. 잠그고 싶지만 나도 모르게 자꾸 풀려버리는 야속한 내 코어. 잠그라고 하니 일단 '흡'하고 다시 배에 힘을 주지만 얼마나 금방 풀려버릴지는 나도 모른다.
'중립'이라는 단어도 그렇다. 선생님이 "척추는 중립 유지!"라고 하면 나는 '제 척추는 중립이 아니라 제 편이거든요?'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선생님이 말하는 척추 중립은 허리를 꺾거나 굽히지 않도록 하라는 말이지만 나에게 익숙한 중립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중간 입장을 지킨다는 뜻이다. 잠그라는 코어는 자꾸 풀리고, 접으라는 고관절은 자꾸 펴지니 척추만큼은 중립이 아니라 그냥 내 편이 되어주면 좋겠다. 사실 내 입장에선 어떤 뼈, 어떤 근육이든 내 편이 되어 잘 움직여만 준다면 이 고마운 마음 영원히 간직하겠노라 약속하고 싶다. 하지만 이 약속은 30분도 지나지 않아 깨지기가 쉽다. 바로 '고립' 때문이다.
국어사전에 '고립'을 찾아보면 '다른 사람과 어울리어 사귀지 아니하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외따로 떨어짐'이라고 나온다. 그런데 우리 선생님은 몇몇 운동에서 자꾸 특정 근육을 고립시키라고 한다. '아니, 선생님.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 매정하신 거 아닙니까. 우리 삼두근이 뭘 그리 잘못했다고 애를 고립시키라고 하세요? 우리 삼두근이 힘은 좀 없지만 애는 착해요.'
운동을 할 때 특정 근육을 고립시킨다는 말은 다른 근육들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그 근육에만 자극을 주는 상태를 유지하라는 말이다. 목표한 근육에 운동 효과를 집중시키기 위해서다. 내 근육들은 비록 힘이 좀 없을지언정 서로 사이가 좋아서인지 서로를 고립시키려 들지 않는다. A근육에만 집중하려고 해도, A가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B근육, C근육이 '너만 고생시킬 순 없지. 기다려. 지금 바로 갈게!'하고 끼어들기 일쑤다.
결국 나는 헬스장에서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는 말이다. 보통 이런 글에서는, 처음엔 잘 못했지만 몇 개월 노력하다 보니 어느덧 잘하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되어야 자연스러운 흐름을 가진 글이 되지 않나. 하지만 내 근육들은 그렇게 진부한 기승전결을 거부라도 하는 듯, 몇 개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비협조적일 때가 많다.
처음 운동을 시작할 때, 내가 못할 거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못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 정도로 더디게 늘 줄도 몰랐다. 그런데도 신기한 것은 이렇게 버벅거리고 헤매면서도 이 운동이 그렇게 싫지 않다는 점이다.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근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근육의 존재를 떠올리며 움직여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근력 운동을 하는 동안은 근육의 존재를 잊어버릴 수가 없다. 게다가 근육을 쓰는 운동을 하고 나면 그다음 날 욱신욱신 신호가 온다. 마치 '나 여기 있는 거 알지? 이젠 잊지 마!'라고 말하는 것처럼.
근력 운동을 하는 동안의 나는 '나'라는 세상에 있는 각 나라에 외교사절단을 보내는 심정이 된다. 앞으로 잘 좀 부탁한다고, 삐걱거리는 사이가 되지 말고 잘 지내보자며 내 몸을 구성하는 부분 부분에 집중하며 힘을 쓴다. 그러다 보면 이 운동에 꽤나 좋은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