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장에는 운동이 필요해 보이는 몸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까? 아니면 이미 운동을 오래 해온 것처럼 보이는 몸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까?
주말이면 경제 방송을 종종 듣는다. 진행자가 어떤 경제 지표의 개념을 설명하다가 이런 어려움을 토로했다. 경제 방송에 입문하는 새로운 청취자를 위해서는 중간중간 이런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이미 이 정도 개념을 기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쉬운 내용이라고. 그런데 이런 걸 좀 알면 좋겠는 분들은 안 듣고 이제 그만 좀 들어도 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빠삭하게 잘 아는 분들만 계속 듣고 계신다고.
그 말을 들으니 헬스장의 웨이트 존이 떠올랐다. 근육을 키우는 곳이 웨이트 존인데, 거긴 이미 많이 키워놓은 근육을 가진 분들이 대다수다. 러닝 머신으로 대표되는 유산소 존에는 나처럼 근육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제법 있지만 웨이트 존에는 운동을 오래 해온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다.
공부를 좀 해야 하는 하위권은 공부를 안 하고, 이미 공부해 둔 게 많은 상위권이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열심히 공부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까. 경제 방송도 경제를 잘 아는 사람들이 더 많이 듣고, 근력 운동도 이미 근육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더 열심히 하고 있다니.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이렇게나 여러 분야에서 발견된다.
경제를 잘 몰라서 경제 방송을 듣고, 근육이 없어서 근력 운동을 하는 나는 다수의 상위권 사이에서 꿋꿋하게 거북이 걸음을 하고 있는 하위권. 가끔은 상위권들 사이에서 살짝 주눅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상위권에서 5점 올리기란 하위권에서 10점 올리기보다 훨씬 더 힘들다는 사실을. 95점에서 100점이 되는 건 40점에서 50점이 되는 것보다 어렵다. 이미 근육이 많은 사람이 운동을 하는 이유는 그 근육량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운동이 그들보다 내 몸에 더 큰 변화를 준다고 생각하면 주눅 든 마음일랑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다.
어느 날, 이미 95점을 넘어선 근육을 몸 이곳저곳에 잘 키워둔 우리 선생님이 바디 프로필을 찍고 왔다고 했다.
"정수기 위에 홍보지 보셨죠? 여기랑 제휴된 스튜디오에서 바디 프로필 찍으면 할인해 줘요. 회원님도 한번 준비해 보세요."
"네? 그.. 그.. 옷 조금만 입고 살색 많이 나오는 사진을요? 어이쿠. 저는 못해요."
"그런 목표가 있으면 운동을 더 열심히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잖아요."
차마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저는 바디 프로필 찍을 만큼 열심히 운동할 생각은 없는데요?'가 나의 솔직한 대답이었으니까. 평균에 못 미치는 골격근량을 평균 범위 안에만 들게 한다면 내 운동은 목표를 달성하는 셈이다. 40점에서 50점으로만 가면 된다는 말이다. 그 후로는 50점만 계속 유지해도 좋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전부다 탄탄한 근육을 자랑한다면 이곳의 문턱이 얼마나 높게 느껴지겠는가. 우리나라는 이제 곧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는데 근육량 감소는 노년의 삶의 질을 크게 떨어트리는 요인 중 하나이다. 근력 운동의 문턱은 낮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나처럼 근육 없어 보이는 사람도 헬스장에 얼쩡거리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위권인 나의 존재는 헬스장을 만만하게 등록할 만한 곳으로 보이게 하지 않겠나. 아, 국민건강증진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이 갸륵한 마음이란!
나는 노후를 위해 적립식 투자를 한다고 생각하며 근력 운동을 한다. 오늘 S&P 500에 투자한 만 원은 20년 뒤 만 원에만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 내가 적립한 근력 운동의 가치가 20년 뒤에 어떻게 불어나 있을지 모른다. 50점만 유지해도 좋겠다는 마음으로 가늘고 길게 계속 운동하다 보면 꽤 건강한 할머니가 되어 있지 않을까. 할머니가 된 나는 지금의 나에게 근력 운동을 시작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게 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