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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다람쥐 Sep 24. 2023

그 말을 아직까지 붙들고 살아요?

 |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 |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차르트가 살던 시대에는 전화가 없었다. 멀리서 서로에게 소식을 전하려면 편지를 써야 했을 테고, 그 덕분에 모차르트가 쓴 편지들이 남아 책으로도 출판되고 있다. 모차르트는 아버지 레오폴트와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레오폴트는 자녀교육에 진심인 아버지였다. 모차르트의 재능을 일찍 발견했고 음악교육자였던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아들이 재능을 꽃피울 수 있도록 섬세하게 지도했다. 더 나아가 자신의 커리어보다는 모차르트의 성공을 위해 길고 긴 연주 여행을 계획하고 실천했으며, 동행하지 않는 연주 여행에서는 꼼꼼한 조언을 담은 편지로 코치 역할을 이어갔다. 누구를 만나야 무대 기회를 얻는데 더 도움이 되는지, 극장 관계자를 만날 땐 어떤 옷차림이 더 좋은지를 조언해 줄 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음악가와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구실로 말을 꺼내는 게 좋을지까지 알려주었다. 레오폴트가 MBTI 검사를 한다면 용의주도한 전략가 INTJ 혹은 엄격한 관리자 ESTJ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신동을 키우고 있지 않기에, 나 자체도 주도면밀함과는 거리가 멀기에, 공감대 면에서 레오폴트와 멀찌감치 떨어진 거리를 유지한 채 그의 편지를 읽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이고 깜짝이야. 깜빡이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대목. 마치 레오폴트가 '내가 너랑은 완전 다른 종류의 사람인 줄 알았어? 모든 부모의 희로애락에는 비슷한 면이 있는 거 몰라?'하고 말하는 듯한 부분이 있었다.


 내가 늙거든, 나를 어떠한 바람이 불어닥쳐도 막아줄 유리 상자에 넣어, 언제까지나 네 곁에 소중하게 놓아두리라 말했던 저 즐거웠던 시절은 이미 사라져 버렸구나.

- 1778년 2월 12일, 레오폴트가 모차르트에게 쓴 편지 중에서 - 


 아버지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려는 모차르트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 문장이 들어있던 가로 128mm, 세로 190mm의 페이지를 넘기며 레오폴트의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어릴 땐 아빠한테 맨날 노래도 불러주고 아빠가 늙어도 언제까지나 소중하게 여길 거라고 말하더니만... 그랬던 애가 이렇게 변하다니...' 하며 어린 시절의 모차르트를 떠올리는 레오폴트가 우리 동네에 사는 흔한 부모 중 한 명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그가 게시판에 고민글을 올리는 상상을 |

 문득 papa_leo1114라는 아이디를 쓰는 레오폴트를 떠올려보게 되었다. 어딘가에 있을 법한 <부모 속풀이 게시판>에 '말 잘 듣던 아들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의 제목으로 글을 올리는 레오폴트를 말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22살 아들을 둔 아빠입니다.
저희 아들은 어려서부터 음악영재 기질이 다분했어요. 영재발굴단에 나오는 애들과 비할 바가 아니었답니다. 네댓 살부터 작곡을 했다면 말 다했지요.
마침 제가 그쪽 업계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제가 끼고 가르쳤습니다. 
... (중략)
... 아니,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데, 여자한테 빠져서 일을 그르치면 안 되잖아요? 다 자기 잘되라고 해주는 말인데, 왜 말을 안 듣는지 모르겠어요. 하... 진짜 속이 터져요.
어제는 애버랜드에서 같이 찍은 사진을 한참 쳐다봤어요. 저희 아들이 어릴 때 아빠 껌딱지였거든요. 아빠랑 맨날 같이 다니며 자기는 커서도 이렇게 아빠말 잘 들을 거라고 말하던 그때가 참 좋았던 것 같아요.


 이 글 아래로 어떤 댓글이 달릴까. 아들의 성공을 위해 열심히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했다며 글쓴이를 위로해 주는 angel1004님, 자기도 애가 말을 안 들을 때마다 어린 시절 사진을 보곤 한다며 폭풍공감을 하는 nadonado2222님, 그래도 아들이 능력이 있어 좋겠다며 자기 아들은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한탄을 하는 dpgb_glaemfdj님의 댓글 아래, good_parenting님이 이런 댓글을 달지도 모르겠다. 


 "좋은 방법을 알려줬는데 아들이 따르지 않아서 속상하실 것 같아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레오님이 아들을 이끄는 게 언제까지 가능할까요? 그리고 그런 기간이 길어지는 게 아들에게 정말 좋은 일일까요? 이제는 아들이 홀로서기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댓글들을 쭉 읽어 내려가던 나는 good_parenting님의 댓글에 고개를 끄덕끄덕 하겠지만, 대댓글은 nadonado2222님에게 달 것 같다. "저는 아침부터 외장하드에 저장해 둔 아이 어릴 적 사진을 한 바퀴 돌리고 두 바퀴째 감상하다가 허리 잠깐 펴고 다시 앉은 거예요. ㅋㅋㅋㅋㅋ"와 같이 방정맞은 댓글을.



| 교육의 원래 목적은 놓아 보내는 것 |

 네 살 무렵의 딸아이가 내게 했던 말 역시 레오폴트가 모차르트에게 들은 말과 비슷하다. 그때 내가 들었던 말은 이랬다. 

 "내가 어른 되면 엄마가 해달라는 거 다 해줄게. 수족관도 데려가 줄게." 

 글로 쓰니 귀여운 목소리가 빠져서, 마치 '나중엔 내가 수족관을 데려가 줄 테니, 지금은 엄마가 수족관을 데려가 줘야겠습니다'와 같은 협상처럼 들릴까 우려되지만 그렇진 않았다. 당시 저 말을 듣던 내 표정은 '언제까지나 곁에 소중히 두겠다'는 모차르트의 말을 듣던 레오폴트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물론 애가 어른이 되었을 때 "수족관 데려가 준다며!"라고 조르는 엄마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 말을 하던 아이의 통통한 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독일의 음악학자 폴크마르 브라운베렌스는 "위대한 교육자였던 레오폴트가 교육의 원래 목적은 놓아 보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고 말했다. 엄청난 재능을 가진 아들을 세상에 제대로 알리고 괜찮은 자리에 취업할 수 있도록 애썼던 레오폴트에게 어떤 마음고생이 있었을지 나로선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앙증맞은 입술로 아빠 앞에서 노래하던 아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레오폴트의 마음은 이해되고도 남는다. 덕분에 모차르트를 키운 아버지에게 감정이입을 해보는 경험까지. 괜히 레오폴트에게 갑작스러운 친근감을 느낀 내가 "어유, 애가 어릴 때 했던 말을 아직까지 붙들고 사시다니요."라고 말한다면 레오폴트는 어떻게 대답할까. "남 말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지금, 진로수업 준비한다고 앉아서 애 어릴 때 동영상만 찾아보고 있는 거 아닌가요?"라고 말하면 어쩌지. 찔리는 게 많은 자는 그냥 입 다물고 있어야겠다.


오스트리아 여행 중 보게 된 모차르트 생가 Mozarts Geburtsha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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