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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명 Oct 21. 2023

성실한 고양이의 1000번째 일기

사실은 고양이가 집사를 키우고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썼던 일기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첫 일기장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가 유치원에 다니던 대여섯 살 무렵에, 아빠는 그 시절 회사원들이 쓰던 수첩을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여러 가지를 적어 넣곤 하셨다. 어린 마음에 그 모습이 부러워서 아빠를 졸라 작은 수첩을 하나 얻어냈고, 그 수첩이 내 첫 일기장이었다. 뭘 썼는지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아빠가 겉표지에 내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준 갈색 수첩의 모양만은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그리고 그 수첩은 항상 처음 몇 장만 공들여 쓰고 띄엄띄엄 쓰다가 끝까지 쓰지는 못한 내 수많은 다이어리들의 시초가 되었다.

쓰고 싶을 때만 띄엄띄엄 쓰는 내 일기와 다르게 나는 2021년부터 여명이 일기를 3년째 하루도 빼놓지 않고 쓰고 있다. 여명이 일기를 처음부터 각 잡고 쓰기 시작했던 건 아니었다. 내 스케줄러에 여명이 관련 내용이 점점 늘어나는 걸 보면서 이럴 거면 여명이 스케줄러를 따로 써야 하나 고민하던 게 여명이 일기로 이어졌다. 여명이의 하루를 글로만 기록하면 귀여움이 하나도 남지 않으니 사진과 동영상도 함께 남기고 싶어서 수첩이 아닌 블로그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2021년 1월 1일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는 올해 추석 연휴 하루 전에 1000일을 맞았다. 1000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뭔가를 써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꽤나 의미 있는 일이었다.

왕관은 됐고 간식이나 달라는 표정

여명이의 일기는 여명이의 시점으로 쓰고 있다. 상상력 부족한 집사의 눈에 여명이의 하루는 늘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집사를 배웅하고 마중하고 다시 밥을 먹고 놀다가 자는 하루하루의 반복으로 느껴졌다. 매일 비슷한 내용을 쓰다 보면 금방 질려서 곧 그만 쓰게 되지 않을까 고민하다가 여명이의 눈과 마음으로 하루를 기록해 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여명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게 낯설고 어색해서 대여섯 줄 정도로 짧게 쓰던 일기가 점점 길어져서 요즘은 그 대여섯 배로 늘어났다.

일기를 쓰는 발이 여명이 발인지 집사 발인지 모를 제목

일기를 쓰면서 늘 비슷해 보이지만 여명이의 하루하루가 사실은 날마다 다채롭게 흘러간다는 걸 깨달았다. 거의 칸트처럼 루틴을 지키며 사는 여명이의 하루를 멋대로 휘저어 놓는 건 대체로 나라는 것도, 같은 장난감으로 같은 공간에서 놀아도 사냥놀이는 날마다 다르게 즐겁다는 것도 일기를 쓰면서 알았다. 생각보다 여명이와 내가 함께 있는 시간이 짧고, 그 시간조차도 온전히 여명이에게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도 새삼 미안해졌다. 여명이 일기 속에서 너무 시간에 쫓기고 무관심한 집사로 그려지지 않기 위해 나는 현실에서 여명이에게 더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떻게 보면 여명이 일기는 그날 집사로서의 내 성적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명이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려보려고 쓰기 시작했던 일기가, 일기를 쓰는 주체인 여명이보다 내 생활에 더 영향을 주는 희한한 경험이었다.

비슷해보이지만 늘 새로운 사냥놀이

일기를 쓰는 동안 달라진 것들은 또 있다. 처음에는 한두 명이 읽던 일기를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읽기 시작하면서 도움이 될만한 정보성 글이라고는 없는 내 블로그에 수입이 잡히기 시작했고 이달의 블로그에 선정이 되기도 했다. 초반부터 여명이 일기를 읽어준 독자들은 이제 여명이의 성격과 호불호를 완벽하게 파악해서 가끔 나보다 더 세심한 부분을 캐치해서 댓글을 달아주기도 한다. 집밖으로 한걸음도 안 나가고 사는 여명이가 얼굴도 모르는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게 여전히 놀랍고 감사하다. 여명이가 우리 집에 온 날이나 여명이의 (추정) 생일에는 추억팔이를 위해 예전 일기들을 꺼내보기도 하는데,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진작에 휘발되었을 기억들이 사진과 함께 생생하게 남아있어서 뿌듯하다. 아래는 작년 추억팔이 일기.

https://m.blog.naver.com/mindyland/222805775864

이제 여명이 일기를 쓰는 게 루틴으로 자리를 잡기는 했지만, 가끔 한 줄도 쓰고 싶지 않은 날도 있다. 하루동안 찍은 여명이 사진들을 보면서 일기에 쓸 사진을 고르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떠올려서 여명이 시점으로 풀어내는 일은 대체로 즐겁지만 가끔은 쓸 말도 딱히 떠오르지 않고 그저 귀찮다. 다음 달부터는 주간일기로 바꿀까, 앞으로는 쓰고 싶은 날만 쓸까, 하며 머리를 굴리다가도 결국 투덜투덜 짧게라도 그날의 여명이를 기록으로 남기게 된다. 남겨두지 않으면 여명이와 함께 보낸 오늘은 차차 잊게 될 테니 단편적으로라도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 귀찮음을 항상 이긴다.

얼마 전 우연히 여명이 일기를 정주행하다가 그사이 많이 자란 여명이를 보며 여명이의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그래서일까, 그날 일기를 쓰면서 먼 훗날 언젠가 이 일기들 때문에 많이 울게 될 날이 오겠다 싶어서 괜히 울적해졌다. 그래도 나중에 가물가물해진 기억 속 아련한 여명이를 떠올리기보다는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았던 여명이의 모습을 일기에서 찾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그날의 사진첩을 뒤적거리며 여명이의 하루를 정리한다. 일기를 쓰는 귀찮음은 어떻게든 내가 이겨내 볼 테니 지난 1000일 동안 그랬듯 여명이는 부지런히 귀엽게 우당탕탕 사고를 치면서 쭉 즐겁게 지내주면 좋겠다.

그렇다면 사양않고 사고를 치겠어...(feat. 도른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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