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의 당일치기로 채운 집사의 여름휴가
생후 2개월 무렵에 나와 만난 여명이는 이제 꽉 채운 3살을 지나서 4살을 향해 가고 있다. 아직도 자기 전에 나한테 몸을 붙이고 누워서 어설픈 어리광을 부리며 노는 걸 보면 아깽이 때와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이제 어른 고양이가 된 지도 한참이라는 게 늘 낯설다. 2020년 7월에 나와 함께 살기 시작한 후로 여명이는 단 하루도 혼자 자본 적이 없다. 코로나라는 특수 상황도 있었고 여명이를 집에 혼자 두고 여행을 가는 게 썩 내키지 않기도 했기 때문에 그동안 내 여행은 나들이와 여행 사이 무언가의 형태를 띠었다. 밥과 물만 잘 준비해 두면 고양이가 하루 정도는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아서 1박 2일 정도는 한번 시도해 볼까 생각도 해봤다. 그런데 퇴근하고 돌아와서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리면 발이 미끄러질 정도로 반갑게 뛰어나오는 여명이를 보면 여행 같은 건 아무래도 좋으니 그냥 여명이랑 집에 내내 눌러앉아 있고 싶은 심정이 된다.
여명이를 위해서 여행을 안 가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사실 코로나 이전에도 여행을 아주 즐겨하는 편은 아니었다. 심지어 여행을 철저하게 계획해서 다니는 스타일도 아니라서 가고 싶을 때 (연차가 허락하는 범위에서) 훌쩍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예전에는 내 짐가방만 챙기면 되는 상황이었으니 훌쩍 떠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내가 없는 동안 여명이를 챙겨줄 누군가를 섭외해야 하기 때문에 너무 갑작스럽게 떠날 수는 없게 되었다. 평소 여행을 자주 하는 편도 아니었으니 그 사실이 아주 원통하지는 않았지만 이러다 어느 날 문득 훌쩍 떠나고 싶어지더라도 실행에 옮기기는 어렵겠다 싶어서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 아쉬움을 덜어낼 방법을 어느 프로그램에서 발견했다. 바로 ‘박하경 여행기’였다. 박하경 여행기를 먼저 본 내 동생과 친구들이 보는 동안 내 생각이 많이 났다면서 꼭 보라며 나에게 추천해 줘서 보기 시작했는데 왜 추천했는지 알 것 같았다. 여명이를 나보다 더 아끼는 동생은 ‘당일치기’ 여행에 주목했고, 내 친구들은 주인공 박하경이 뜬금없이 무계획으로 훌쩍 떠나는 모습에서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여러 사람의 추천으로 박하경 여행기를 보면서 앞으로 여명이 집사로서의 내 거의 모든 여행은 저런 모습이 되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올여름, 내 휴가는 다섯 번의 당일치기로 채워졌고 4박 5일 여행보다 즐거웠다. 여행도 즐거운데 심지어 매일매일 여명이 얼굴도 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까.
당일치기 여행에는 큰 불만이 없지만 가끔 여행 중에 아쉬울 때는 있다. 여명이가 타고 오르기 좋은 나무를 발견하거나, 하루종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여명이가 좋아할 것 같은 풍경을 보면 그 자리에 여명이도 함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강아지들처럼 고양이도 함께 여행을 다닐 수 있으면 좋겠지만 영역 동물인 고양이에게는 현관을 나서는 것부터가 스트레스일 테니 그럴 수가 없어서 항상 아쉬움으로 남는다. 심지어 길에서 나고 자랐으면서도 여명이는 겁이 아주 많아서 이동가방만 꺼내도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으로 통곡을 하고 집에 누가 오는 것도 질색한다. 작년 설 연휴에 부모님 댁에 데려갔다가 3박 4일 동안 침대 밑에서 식음을 전폐한 여명이를 보고 같이 여행을 다니는 건 꿈도 못 꾸겠다고 새삼 느꼈다.
이번 추석 연휴에도 여명이는 집에 두고 내가 매일매일 부모님 댁에 출퇴근하는 느낌으로 가야 한다. 그나마 부모님 댁과 우리 집이 같은 구에 있어서 다행인가 싶다가도 내가 너무 여명이를 너무 오냐오냐하며 키우는 건 아닌가 문득 욱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읽은 ‘고양이의 하루는 사람의 사흘과 같다’는 말을 떠올리며 빠르게 흘러가는 여명이의 시간이 편안함으로 채워질 수 있도록, 내가 조금 더 번거로운 게 낫다고 생각을 정리하곤 한다. 앞으로도 내 여행은 박하경 여행기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형태일 것이고, 되도록 자정 전에는 집에 도착하려 노력하는 신데렐라처럼 빡빡한 생활을 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매번 번개같이 뛰어나오며 나를 반갑게 맞아줄 여명이를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이 오래오래 이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