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버'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외국 영화에 나오는 멋진 남자 배우의 이름인가 싶었다. 하지만 존버는 어감이 주는 고상함과는 달리 비속어와 '버티기'가 결합한 신조어였다. 참 품위 없는 단어가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 품위 없음이 더 많은 사람을 당기고 있었고(사람은 원래 일탈을 즐기니까) 그렇게 여기저기에 존버가 자주 등장했다.
많은 사람들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지금을 묵묵히 견딘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나에게 설렘과 기쁨을 주지 못한다 해도 그렇게 버티다 보면 결국 꿈에 그리던 삶을 나중엔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버틴다. 하지만 과연 그런 존버 끝에 그리던 꿈이 나에게 찾아오기나 할까.
난 존버가 싫었다. 인생을 누리고 싶었지 버티기는 싫었다. 아니다 싶으면 내 의자를 옮겨버리는 나는, 남들 눈에 참을성 없는 노마드 인생일 수 있었겠지만, 차라리 난 지금의 인생을 누리기 위해 인생을 탐험하는 노마드이고 싶었다.
지금 나에게 의미 없는 일들에 에너지를 쏟으면, 정작 내가 원했던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이 왔을 때 그것을 위해 쓸 에너지가 고갈되어 있진 않을까. 노후의 안락함을 위해 지금 뼈 빠지게 일하며 고생하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 것일까. 난 그렇게 미뤄둔 인생이, 그렇게 버티며 산 인생이 후에 빛을 발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기회를 미루고, 지금을 고갈시킨다면 나중을 위해 남겨질 에너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돈은 있어도 기력이 달려서, 혹은 돈을 쓸 줄 몰라서 초라한 인생을 사는 노인이 되긴 싫었다. 만족스러운 가운데 죽기 위해 난 지금을 살기로 했다. 보이지 않는 미래 때문에 내 현재를 갉아먹고 싶진 않았다. 지금 꽃을 피워야 나중에도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좀 참고 인내해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버티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확실한 희망 앞에서는 '버티기'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확실한 희망이 있다면 하기 싫은 일도 즐거운 일이 된다. 버틸 필요가 없이 즐길 수 있다.
하지만 확실한 희망이 없다 해도 다른 식으로 즐길 방법이 있다. 그 일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바꾸면 된다. 그래서 난 의자를 옮기지 않고서도 의자를 아름답게 볼 수 있을지를 먼저 궁리했다. 공간이 지배하는 힘보다 내가 바라보는 시선의 힘이 더 크다면 난 시선을 바꾸어 의자의 아름다움을 찾아보기로 했다. 내가 하는 일이 버티기보다 즐길 수 있는 무언가가 되었을 때 나의 자리는 아름다운 의자였다.
같은 환경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어떤 이는 존버를 하고, 어떤 이는 그 일을 즐긴다. 김민식의 <외로움 수업>이란 책에 이런 글귀가 있다.
"호텔 청소하시는 분이 그러더군요. 호텔의 상품은 ‘깨끗한 방’입니다. 손님이 퇴실한 후 방을 청소하는 건 새로운 상품을 제조하는 일이지요. ‘나의 노동으로 새로운 상품을 만든다.’ 호텔에서 청소하시는 분이 자신의 업을 이렇게 정의하는 걸 보고 감탄했어요."
어떤 이는 호텔 청소 일을 고급 상품 제조업으로 여기고 그 일을 즐기는가 하면, 같은 호텔 청소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하찮은 육체노동으로 전락시키며 마지못해 존버를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둘 중 누가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일까? 내가 나의 일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우리의 의자는 격상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시선이 공간의 지배에까지 휘둘리게 되면, 나는 가차 없이 의자를 옮겼다. 어찌 보면 난 참을성도 부족하고, 지구력도 약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환경 적응력도 떨어지고, 정신이 나약한 인간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내 한계라는 것을 받아들였고, 내 한계 범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즐기며 하고 싶었다. 의자를 여러 번 옮겨야 하는 수고로움을 겪더라도 나는 즐겁게 현재를 즐기고 싶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난 존버가 싫다.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친 이승복 어린이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나는 존버가 싫어요!'를 늘 외치고 있다. 지금의 삶을 충만하게 살고 싶다. 내가 팔딱팔딱 뛰어다니며 자리를 옮기는 메뚜기처럼 보인대도 괜찮다. 팔딱팔딱 새로운 풀잎을 찾아 나서는 메뚜기처럼, 여름엔 여름을 즐기며 겨울 걱정은 잠시 미뤄두고 노래할 수 있는 메뚜기처럼, 난 그렇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