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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향기 Apr 09. 2023

'서울대'와 '교사'라는 딱지를 떼기로 했다.

내 자리라고 생각했던 딱딱한 나무 의자는 분명 나를 찾을 수 있는 자리였지만, 의자를 둘러싼 공간은 나를 그 의자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게 했다. 아니, 난 의자를 둘러싼 공간에 오래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나의 의자를 다른 공간으로 옮기고 싶었다.


2년간의 교사 생활 후, 휴직서를 냈을 때 교감 선생님과 많은 선생님들은 나를 말렸다. 시작은 '휴직서'였지만, 그렇게 3년이 지나면 곧 '사직서'가 될 것이었다. 겨우 교사 생활을 시작한 마당인데 휴직서를 내는 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난, 처절하게 노력해 얻게 된 모든 타이틀을 처절하게도 쉽게 포기할 수 있었다. 처절한 노력으로 얻은 성과물이 결국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그렇게 대단한 것들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난 미련 없이 그것들을 벗어던질 수가 있었다.


하다 보니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내가 사범대를 들어가고 교사가 된 것은 엄마의 영향이 컸다. 엄마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교사의 꿈을 딸이 이뤄주길 바라신 것 같았다. 사실 나는 공부만 열심히 할 줄 알았지, 내가 무엇을 원하고 되고 싶어 하는 가를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터라, 차라리 엄마가 그렇게 진로를 정해주신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지금의 나라면 여러 가지 꿈을 꿔보았겠지만, 그때의 나는 그저 공부에만 길들여진 꿈이 없는 아이였다.


내가 바라던 꿈을 이룬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바라던 꿈을 이루어 사는 나에게는 교사라는 타이틀도, 서울대라는 학벌도 소중한 그 무엇이 아니었다. 다 벗어던지고 '나'라는 인간으로 살고 싶었던 소망이 커가고 있었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를 찾고 싶었다. 그때 난 오래도록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만났다. 그와 결혼하면 외국 땅에서 살아야 했기에 난 사랑을 선택할지,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고수할지를 선택해야 했다.


외국에서 산다고 엄청나게 밝은 미래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오직 그 사람 하나만 보고 선택해야 했다. 내가 가야 할 곳은 70년대 한국에도 못 미치는, 생활 수준이 무척 낙후해 수도 시설조차 제대로 갖추어 있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자연만큼은 풍요로운, 태평양 한가운데 마리아나 제도의 티끌보다도 더 작은 섬이었다. 고민과 미련은 없었다. 그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곳에 가면 나라는 사람에게 붙은 모든 타이틀이 무용지물이 될 것 같았고, 사람들도 나를 그런 배경 없이 오롯이 나로 봐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난 쉽게도 모든 것을 뒤로하고 과감하게 나에게 붙어있던 거추장스러운 딱지들을 떼버리기로 했다.


교사로서 생활하는 동안, 학교라는 조직 사회의 일원으로서 나는 빵점이었다. 조직의 일원이 되어야 하기에 잠자코 따라야 하는 수많은 암묵적 규율들이 나를 옭아매는 것 같아, 나는 때로 요즘 MZ세대들이나 할 법한 행동들을 많이도 일삼았다.


교사의 법정 근무시간이 9시부터이니 나는 9시까지 출근하겠다고 당돌하게 말했을 때, 교감 선생님은 '날 잡아 잡숴란 말이지?'라는 표정이었다.

'법정 근무시간을 아예 8시부터로 정하면 될 텐데 왜 9시부터 근무시간을 잡아 놓고서는 일찍 출근하길 요구하시냐'라고 묻는 새파랗게 젊은 여교사를 보며 교감 선생님은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회식 자리에서 교장 선생님이 돌아가며 여교사들의 손을 잡고 다독여(?) 주고 싶어 하셨을 때 나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 그다음 날 심기가 불편하신 교장 선생님의 교장실에 불려 가서도 난 두 눈 똑바로 뜨고

'그 자리보다 더 중요한 약속이 있었어서 일찍 갔습니다.'라고 말했다.


난 어떤 기계의 부속품이 되어가는 그 느낌이 싫었다. '나'라는 자아는 없고, 학교라는 큰 기계를 굴리기 위해 소모되는 부품이 되어간다는 느낌이 점점 커지자 교사 생활에도 회의가 생겼다. 물론 아이들과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아이들을 가르치며 짜릿한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 즐거웠지만 거대한 조직 사회에서 내가 넘어야 할 산들은 날 숨 막히게 했다. 난 그런 것들에 무기력을 느끼지 않고 지낼 만큼 어른이 되어있질 못했다.


내가 교사 생활을 하면서 즐거웠던 일은 급식시간에 자취생은 결코 만들어 먹을 수 없는 맛있는 요리들을 맛볼 수 있었다는 것과, 나와 정신연령이 비슷한 아이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아이들과는 정말 잘 통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어서, 난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동료 교사들과 보내기보다는 아이들과 어울리며 낄낄거렸다. 그런 아이들과의 이별은 힘들었지만, 학교라는 거대 조직에서 벗어나고 싶었기에 난 짧은 교사 생활을 접기로 했다.


나를 잘 모르는 친구들은 나에게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까지 가고, 어렵게 임용고시 붙어서 겨우 교사가 되었는데, 딸랑 결혼 때문에 그렇게 쉽게 모든 걸 버릴 수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날 잘 아는 친구들은 내가 또 다른 나를 찾는 여행을 떠나는 길에 서있다는 것을 잘 알고 나의 축복을 빌어주었다.


그렇게 낯선 땅에서 나를 찾는 여행은 시작되었고, 난 그동안 내 인생에서 주어지지 않았던 오랜 휴식을 만끽하며 나도 모르고 있었던 나를 찾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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