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나를 닮아 승부욕이 강한 아이였다. 어릴 때 나처럼 지기 싫어 공부하는 꼴이 나랑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며 많이 안타까워 어린 시절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타고난 승부욕은 내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공부에 대한 경쟁 분위기가 거의 없다시피 하는 이 호주에서, 아들은 시키지도 않은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리고는 결국 목적 없는 경쟁을 위한 경쟁이 자신에게 상처만 된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한창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때, 모두가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는 시기, 아들은 고등학교에서 마지막 학년을 다니고 있었다. 한국에선 고3, 여기선 12학년. 졸업을 앞두고 세상이 뒤숭숭해지자 아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만 했던 아들은 어느 날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난 안 쓰던 마스크를 쓰는 것이 너무 답답해 생기는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들은 계속 숨 쉬는 것이 너무 답답하고 마스크를 쓰면 자신의 숨구멍을 누군가가 틀어막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아들은 의사의 도움을 받기 위해 평소에는 가보지도 않던 병원을 갔고, 의사는 불안장애와 공황장애의 초기 증상인 것 같다고 했다. 약을 처방하지는 않겠지만 심리상담과 인지행동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아들은 이 일로 그동안 자신을 너무나 닦달하며 산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좋아하지도 않는 공부를 승부욕을 채우기 위해 해 온 것이 자신의 정신과 몸을 해치고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졸업시험을 앞두고 아들은 더 이상 자신을 닦달하지 않겠노라 선언했고, 따놓은 당상이었던 1등 자리를 라이벌 친구에게 내주고 2등으로 졸업했다. 막판에 자신을 놓아주긴 했지만, 그동안 쌓아 놓은 것들 덕분에 아들은 졸업시험에서도 최상위권에 들었고 대학들에서는 장학금을 제시했다. 하지만 자신을 좀 놓아주기로 결정한 아들은 1년간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기로 하고 취업도, 진학도 미뤄두기로 했다.
아들이 대범하게도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쉴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다양한 삶을 수용해 주는 '호주'라는 사회에 살기 때문이기도 하다. 호주에서는 아들처럼 갭 이어(gap year)를 갖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다. 호주에선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선택한 삶을 자유롭게 펼쳐볼 수 있는 사회적 시선과 분위기가 갖추어져 있기에 아들은 더 쉽게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대학들에서는 입학만 하면 장학금을 주는 조건을 당분간은 유지해 줄 테니 입학할 의사가 생기면 다시 알려달라고 했다. 아들에게 이는 큰 유혹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호주 대학생들은 학비를 국가에서 무이자로 융자받아 취업을 하게 되면 조금씩 갚아나가고 있다. 학비가 상당히 비싼 편이라 취업 후에도 상환 부담이 상당하다. 그렇기에 아들이 제시받은 4년 전액장학금의 기회를 당분간 홀딩해 준다는 대학 측의 제안은 상당히 유혹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들은 1년의 갭 이어를 보내고 자신은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 아들의 선택은 나에게도 충격이었고 주변사람들 모두에게도 충격이었지만, 아들의 결정이 충동적인 결정이 아닌 것을 알았기에 우린 아들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아들은 대학생활 대신 기술을 배우기로 선택했다. 말이 기술이지 고된 노동자의 삶이다. 그 기술을 배우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도시락을 싸야 하고, 달려간 현장에선 온갖 흙 때 다 묻히며 움직이는 고된 노동이 수반된다. 이전에 꿈꿔본 적도, 해본 적도 없는 일을 아들은 지금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선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의 휴식기를 가지는 동안 자신을 탐색하고, 삶을 탐색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신중하게 내린 결정이었다. 그런 결정이 모험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결정이 틀릴 수도 있고, 잘못된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엄마인 나는 한편으로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선택한 것을 과감하게 할 젊음의 패기가 부럽기도 하다.
아들은 누구나 가는 편안하고 안정된 길을 가기보다 자신의 길을 만들어 걸어가고 있다. 난 지금의 아들 나이에 '나'를 잃어버린 것 같아 방황했지만, 아들은 자신을 찾아가는 모험의 길 위를 걷고 있다. 그 길 위에 선 아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싶다. 그래서 난 글을 쓴다. 나의 글은 말하자면 아들에게 보내는 응원의 이모티콘이자, 소망을 담은 엽서이며, 사랑을 담아 흔드는 손수건과 같은 것이다. 고이 접어 보내고픈 연애편지다. 나는 '나'를 찾기 위해 달고 있던 딱지들을 버렸고, 아들은 '나'를 찾기 위해 딱지 달기를 거부했다.
'스펙'이라 이름 불리는 그 딱지들을 달지 않고서도 '나'를 찾을 수 있고, 내가 진정 원하는 아름다운 삶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아들이 온전히 느끼기를 바란다. 평범해 보이는 하루를 살면서, 나를 둘러싼 자연을 바라보면서 얻게 된 '나'를 찾는 방법들을 아들도 함께 지켜봐 주길 바란다.